취업준비생 A(24)씨는 지난달 24일 대뜸 경찰로부터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됐다”며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A씨의 혐의는 ‘사기 방조죄’였다. 교정직 공무원을 준비하던 A씨는 한순간에 피의자 신분이 됐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구직 플랫폼을 통해 한 법률사무소에 아르바이트 지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A씨가 이력서를 낸 곳은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이 운영하던 가짜 법률사무소였다. 이 법률사무소는 채권추심(채무자가 갚지 않은 빚을 대신 받아내는 것) 업무를 할 아르바이트생을 찾고 있다고 했다.
A씨는 지난달 중순쯤 이 법률사무소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B씨에게 전화를 받았다. B씨는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에 올라온 이력서를 보고 채용하고 싶어 연락했다”며 “2주 동안 채권추심 업무를 하면 내근직으로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A씨는 포털사이트에 해당 법률사무소가 진짜로 있는 곳인지 검색했고, 실제로 법률사무소 홈페이지가 나왔다. 홈페이지에는 변호사 소개와 그동안의 업무 사례가 자세하게 나왔다. A씨는 홈페이지를 보고 B씨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법률사무소의 홈페이지 자체가 가짜였다. 이 홈페이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국내 한 법무법인의 홈페이지를 그대로 베껴서 만든 가짜 사이트였다. 법무법인이 맡았던 주요 업무 사례뿐만 아니라 소속 변호사의 얼굴과 프로필 정보까지 전부 판박이처럼 복제했다.
의심을 거두고 채권추심 아르바이트 일을 수락한 A씨는 지난달 16일부터 23일까지 추석 연휴를 제외한 3일 동안 일을 했다. B씨가 지정해준 인물에게 현금을 받아 사무소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A씨는 매번 500만원가량씩 총 6회 현금을 전달했다. B씨는 A씨에게 매번 10만원씩을 알바비로 챙겨줬다.
A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정상적인 채권추심 업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채무자가 아닌 보이스피싱 피해자로부터 돈을 받아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실제 채권추심 절차는 채무자에게 빚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적 권한을 부여받아 판결문을 보여주면서 채무를 돌려받아야 한다. 밤늦게나 공휴일,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채무자에게 돈을 달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A씨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한순간에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피의자가 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조직이 아르바이트 업무를 빙자해 A씨 같은 사회초년생이나 취업준비생을 현금 전달책으로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연령별 보이스피싱 가담자 검거 현황’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지난달까지 5개월간 1만2588명의 검거자 중 20대 이하가 5068명으로 40.3%를 차지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현금 수금책을 이용한 대면편취형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2019년 3244건에서 2020년 1만5111건으로 늘었다. 1년간 대면 편취 보이스피싱 수가 78%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는 지난해 보이스피싱 3만1681건 중 절반 수준인 47.7%를 차지하는 비율이었다.
실제로 취업준비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사기를 당해 현금 전달 업무를 하다 사기 방조죄로 기소된 사례도 있다. 지난 6월 24일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 형사2단독 권순향 판사는 사기 방조죄로 기소된 B(28)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B씨 역시 앞선 A씨의 사례와 비슷하게 구직 사이트에 등록한 이력서를 보고 연락 온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지시를 받고 수수료 형태의 일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취업준비생들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표적이 되기 쉬운 만큼 취업 전 더 꼼꼼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보이스피싱범들은 피해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해 현금 전달책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라며 “취업준비생 입장에서 확인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취업하기 전 직접 회사를 가보고,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변호사의 자격증을 법률사무소나 로펌 등이 가지고 있는지 등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취준생들을 타깃으로 한 다양한 보이스피싱 수법이 나오고 있다”며 “의심스러운 정황이 하나라도 있을 시 또 다른 범죄 피해를 막기 위해 빠르게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