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에는 녹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묘하게 태우더라.”
경기도 소재의 국립병원 신입 간호사로 일을 시작한 최진희(가명)씨는 “입사 후 한달 만에 동기의 3분의 1이 퇴사했다”면서 “앞에서 험담을 하면 녹음을 할까봐 밖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욕을 하기도 하고, 태우기 전에는 ‘뭐라고 하는 건 아니다’라는 말을 붙이기도 했다”고 하소연했다.
최씨는 “근무시간 안에 다 마치지 못할 일을 주고, 12시간 연속 일을 한 뒤에도 ‘네가 부족해서 못한 것’이라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면서 “동기가 실수하면 다른 동기들을 불러놓고 욕을 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게 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 고(故) 박선욱 간호사와 2019년 고 서지윤 간호사의 죽음으로 병원 내 괴롭힘인 ‘태움’이 알려졌다. 태움으로 인한 사망이 산업재해로 인정받고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지만, 현장 간호사들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고 호소했다. 심지어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 간호사 태움 문화가 더 교묘해졌다고 토로했다.
서울시의 한 종합병원에 취업해 두달 만에 그만둔 간호사 A씨는 “선배 간호사가 ‘네가 하는 모든 것, 청소하는 것조차 더럽고 쓸데없다'고 폭언을 퍼부었다”면서 “옷을 갈아입는 시간 등 녹음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님 욕을 하거나 심한 말을 집중적으로 했다”고 하소연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태움과 폭행을 저지른 간호사의 교수 임용을 취소해 달라”는 글이 올라와 1만6000여명의 동의를 받기도 했다. 피해를 주장한 간호사는 “셀 수 없는 폭언, 폭행 등을 당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그는 “악성 균 감염환자에게서 뽑은 가래침이 든 통을 뒤집어 씌우더라”며 “아직도 그날의 가래 색과 느낌, 냄새까지 모두 기억이 난다”고 썼다.
정부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을 통해 갑질 문화를 개선할 수 있다고 봤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설문조사에 따르면 ‘변화가 없다’는 대답이 71%, 오히려 8%는 ‘증가했다’고 답했다. 2019년부터 법이 시행됐지만, 변화를 느낀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간호사협회에서 11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에서도 괴롭힘 금지법 시행 후 ‘변화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39%였다.
이같은 태움 문화의 배경에는 충분한 교육 없이 업무에 투입되는 등 열악한 근무환경도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간호사회가 발표한 ‘병원 간호 인력 배치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간호사의 이직률은 44.5%에 달했다. 이같은 이직률은 업무 과중에서 온다는 분석이다. 대한간호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료 기관 근무 간호사 수는 3.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8.9명의 절반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간호사들간의 태움 문화에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선 산업재해 규정을 완화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홍상 더드림 직업병연구원 대표노무사는 “법이 만들어져도 실제 정착되기까지 다양한 판례와 사례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처벌을 받은 누적 사례가 부족하다”면서 “피해 근로자에 대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기준을 완화해 법안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