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5년 5월 13일 오후 4시 15분 조선비즈RM리포트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물품 제조사가 대리점에게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제재하는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지난 2016년부터 시행되고 있다.갑(甲)인 제조사가 을(乙)인 대리점을 상대로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남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공정거래위원회는 제조사−대리점 관계에 대해 대리점법을 폭넓게 적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최근 법원에서 “제조사가 대리점보다 규모가 크더라도 대리점이 제조사를 선택할 수 있는 시장 구조라면 우월적 지위 남용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제조사가 대리점과 실질적으로 갑을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법 위반에 따른 제재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공정위 “이자부담 30억원을 대리점 130곳에 떠넘겨”
공정위는 2023년 4월 제일사료에게 과징금 9억6700만원을 부과했다. 이와 함께 ‘사료 거래처가 사료대금을 늦게 지급해 발생한 연체 이자를 대리점 수수료에서 차감해서는 안 된다’는 시정명령도 내렸다. 제일사료가 2009년부터 2021년까지 농가에서 받지 못한 사료값에 대한 연체 이자 30억원을 130개 대리점에 지급할 수수료에서 깎는 식으로 떠넘겼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었다.
두 회사는 제조사−대리점 관계에 있었고 규모도 차이가 컸다. 제일사료는 하림 계열 가축용 사료 제조사로 작년 매출이 7900억원 수준이다. 반면 대리점들은 매출이 많으면 수억원인데 그 매출의 상당 부분이 제일사료와 거래에서 나온다. 한 법조인은 “겉모습만 본다면 두 회사는 갑을 관계로 대리점이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제일사료가 공정위 제재를 받을 수 있는 형태”라고 말했다.
◇ 법원 “실제로 甲乙 관계 있는지 따져봐야”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와 시정명령에 대해 제일사료가 소송을 냈다. 법무법인 태평양이 변론을 맡았다. 제일사료와 판매 대리점이 갑을 관계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법무법인 태평양은 국내 배합사료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제일사료와 판매 대리점은 갑을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관계라는 내용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우선 태평양은 국내 사료 시장 구조를 재판부에 설명했다. “국내 배합사료 시장에선 60여개가 넘는 제조사가 경쟁하고 있고, 제품 특성상 차별성이 크지 않아 가격 경쟁이 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리점이 농가의 배합사료 선택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도 했다. 특정 사료 제조사가 시장을 좌우할 수 없고 오히려 대리점이 소비자에게 특정 제품을 권유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어 태평양은 대리점들이 제일사료와 전속 계약을 맺지 않고 다른 사료 제조사와 병행 계약도 맺을 수 있다고 재판부에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제일사료의 매출이 감소한 사례도 제시됐다. 제일사료가 판매 대리점에 일방적으로 갑질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대리점에게 잘 보여야 하는 처지라는 것이다.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구회근)는 제일사료가 공정위를 상대로 제기한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 명령 취소 소송에서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모두 취소한다’고 최근 판결했다. 재판부는 “제일사료가 사업능력이 큰 공급업자에 해당한다는 사정만으로 대리점에 대해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공정위 조사 절차에 대한 지적도 내놓았다. 이 사건을 신고한 대리점 1곳만 조사한 뒤 처분을 내린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다. 재판부는 “공정위는 신고인의 주장과 일반적인 공급업자·대리점과의 관계 만을 근거로 원고가 이 사건 대리점들 ‘전부’에 대해 거래상 우월적 지위가 있다고 단정한 채 처분을 한 것”이라고 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권도형 변호사는 “앞으로 공급업자의 대리점에 대한 거래상 지위 인정 여부를 판단할 때 거래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대체거래선을 용이하게 찾을 수 있는지, 공급업자와 거래를 함에 있어 특화된 투자가 필요한지 등 개별적·구체적인 사정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