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일면식도 없는 행인에게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숨지게 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피의자의 신상정보가 26일 공개됐다./뉴스1

서울 신림역 ‘묻지마 살인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사면서 일부에선 사형제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는 한국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한국의 현실과 국민 법감정을 고려해 절대적 종신형 도입 등 현실적인 법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사형제, 폐지할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한국은 그간 사형제 유지와 폐지 사이에서 약 30여 년간 어중간한 태도를 보여 왔다. 사형제 폐지가 가입 전제인 유럽연합(EU)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데다 국민 법 감정상 사형제를 아예 없애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사형제에 대한 국민 여론도 치열하게 갈리는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어려운 모양새다. 이런 이유로 사형제 관련 논의는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을 제외하면 사실상 방치돼 왔다.

다만 정부는 그간 사형제의 위헌 여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심리 과정에서 모두 ‘사형제 유지’ 의견을 밝혀왔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21년 “위헌 취지의 결정이 나올 경우 심각한 입법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밝힌 바 있다. 윤석열 정부도 작년 6월 공개변론을 앞두고 제출한 의견서에서 “사형은 야만적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에 합치된다”며 간접적으로 찬성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반면 실질적 사형 집행은 지난 1997년 12월 30일 이후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 역시 지난 2016년 GOP 총기 난동으로 5명을 살해한 임모 병장이 마지막이다. 최근에는 대법원이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다른 수형자를 살해한 강도살인범에게 사형을 선고한 항소심을 파기한 바 있다.

형법 제72조 1항에 따르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죄를 ‘뚜렷하게’ 뉘우친다면 20년 복역 후 가석방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이와 달리 유기징역형은 전체 형량의 3분의 1을 살아야만 가석방 심사를 받을 수 있는데, 이때 잔여 형기가 10년 미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예를 들어 징역 40년형을 선고 받은 A는 형기 30년을 채워야만 가석방 자격을 얻을 수 있는데,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B는 20년만 살면 가석방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법조계에서는 “입법부가 ‘가석방 없는 종신형’ 형태의 무기징역 제도를 조속히 입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21년 7일 광주고법 전주재판부는 아내의 지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입법부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입법해,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되는 대한민국에서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밝혔다. 2019년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2014년 대구지법 서부지원에서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언급한 바 있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스1

◇‘가석방 없는 종신형’ 공개 논의 필요”

가석방 없는 종신형 입법화는 근래까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형법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도입할 것이냐”는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의 질의에 “복잡한 문제지만 단순하게 제 생각 말씀드리면 취지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다만 사형제 폐지를 가정한 것이라는 전제를 달면서 “(사형제에 대한 헌재의) 위헌 여부 결정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이후에 유력하게 검토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한 장관의 발언은 헌재가 사형제에 관해 합헌 결정을 하지 않을 것에 대비해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취지로도 풀이된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1996년과 2010년 사형제에 대해 두차례 합헌 결정을 내렸으며, 사형제도에 대한 세번째 헌법소원 심리를 진행 중이다. 법조계에서는 사형 집행과 폐지에 관한 헌재의 3번째 판단에서는 합헌 결정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사형제에 관한 논의와 입법이 시작된지 30년이 다 돼가는 데 바뀐 건 없다”며 “재판 실무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논의 자체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지난 2000년 16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자동 폐기됐다. 5년 뒤 17대 국회에서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골자로 한 사형제폐지 특별법이 법사위에 처음으로 상정됐지만 이마저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2021년 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2년 가까이 잠든 상태다.하지만 최근 가석방되는 무기수 중 흉악범죄자들도 포함되면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이 장기간 유기형을 선고받은 이들보다 더 중한 형을 선고받았음에도 가석방 대상 시점이 빠르다는 입법적 문제가 존재한다”며 “시급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이미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지난해 5월 뉴욕주 이리카운티 법원은 버펄로시의 슈퍼마켓에서 총기를 난사해 10명을 숨지게 하고 3명을 다치게 한 10대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