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글로) 적었지만, 이 책에는 피해자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당사자분들에게 직접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사 5년차, ‘번아웃(burnout·심신 소진)’이 왔고 건강도 나빠졌다. ‘지난 시간 동안 뭐 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남은 게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오래 꿈꿨던 직업을 포기하진 못했다. 그래서 글을 모았다. 플랫폼 브런치에서 ‘뚝검’이란 이름으로 개인적인 일과 검사로서 사건을 처리했던 과정들을 일기 쓰듯 써내려갔다. 이 글을 한데 모아 펴낸 책 ‘슬기로운 검사생활’의 인세를 기부한 서울중앙지검 조세범죄수사부의 정거장(36, 변호사 시험 2회) 검사 이야기다.
지난 3일 서울 서초동 모처에서 조선비즈와 만난 정 검사는 최근 책 출간 후 처음으로 정산된 여섯 달 치 인세를 받았다고 했다. 통장에 찍힌 금액은 107만여원. 그는 서울중앙지검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인세를 전액 기부했다.
사비로 100만원을 더해 기부한 금액은 200만원이었다. 그는 “피해자와 피의자의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는 첫 인세인 만큼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얼마전에는 이원석 검찰총장으로부터 책 출간과 관련해 격려의 메시지도 들었다.
정 검사가 범죄 피해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방화와 흉기 난동으로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한 ‘안인득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임검사였던 정 검사는 “당시 지청장께서 ‘뉴스도 보지말고, 피해자도 조사 외에 만나지 말라’고 하셨다”며 “검사가 공정하게 사건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지청장 말씀을 새겼지만, 분노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검찰은 안인득의 전형적인 계획범행으로 보고 살인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정 검사는 “피해자와 유족에게 마음이 쓰였다”며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도와줘서는 안 되고 제도에 따를 수밖에 없어 무력감도 조금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사건을 잘 처리해서 피해를 구제하는 것이 제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다”며 “그래서 (기부를 계기로) 직접 도와드리기 어렵지만, 갑작스레 범죄피해를 본 분들이 여전히 많으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정 검사의 아내도 흔쾌히 기부를 응원했다. 아내는 원고를 함께 수정하고 작가 소개를 쓴 사람이자 ‘슬기로운 검사생활’의 첫 독자이기도 했다. 아내는 안인득 사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소송에 관여한 바 있는 법조인이다.
정 검사는 “결혼을 준비하며 책 작업을 하는 상황에서 글의 표현을 고치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며 “사실상 합작품”이라고 했다. 이어 “인세를 받은 뒤, 같은 법조인인 만큼 의미 있는 일에 동참키로 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적은 금액이라도 추가 인세를 계속 기부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정 검사는 “짧은 검사 생활이지만 피해자나 피의자로 힘든 분들을 많이 봐 왔다”며 “추후에도 이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