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 한 관람객이 영화 ‘한산 : 용의 출현’과 ‘비상선언’ 포스터 옆을 지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다. /뉴스1

코로나19가 영화계에 남긴 상처는 컸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 ‘기생충’이 전 세계를 휩쓴 직후라 그 상처는 더욱 돋보였다. 2020년 초부터 극장 침체기가 시작되더니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는 직격탄이 됐다. 오후 9시 이후 영화관 이용 불가, 띄어 앉기, 취식 제한 등으로 빈사 상태나 다름 없었다. 손익분기점 돌파가 어려워지자 작품들은 잇따라 극장을 외면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옮겨갔다. 관객이 줄어드니 작품이 없고, 작품이 없으니 관객이 줄어드는 지독한 ‘악순환’에 빠졌다.

그러다보니 ‘고정 지출’은 크고 작은 분쟁의 씨앗이 됐다. 코로나19를 예측할 수 없던 상황에서 이뤄진 계약에 근거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렸다. 영화관들은 극심한 매출 부진 여파로 다수 직원을 집으로 보내야만 했다. 특히 임대료 분쟁은 전 업종을 막론하고 불거졌는데, ‘대기업이 운영하는 영화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기 임대차계약을 맺는 영화관 특성상 계약 내용을 쉽게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산업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긴 지 3년여 만인 지난 7월, 임대료 분쟁과 관련한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부장판사 송승우)가 ‘코로나19 등 불가항력으로 피해를 본 영화관에게 건물주가 임대료 일부를 감액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놓은 것이다. 소송을 이끈 이재근(사법연수원 28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임차인이 대기업이어도 임대인과 ‘상생’이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 판결은 영화관 업종에서 감액이 인정된 첫 사례로, 현재 진행 중인 다른 유사 분쟁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대기업도 예외 아냐”... 소송으로 번진 임대료 분쟁

국내 멀티플랙스 영화관을 운영하는 CGV도 예외는 아니었다. CGV의 A지점은 3년간 수십억원 적자에 시달린 끝에 소송을 제기했다. A지점은 해당 건물주와 2017년부터 2037년까지 임대한다는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통상적으로 음향시설이나 스크린, 좌석 등을 갖춘 영화관 인테리어는 일반 사무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장기 임대차계약을 체결한다. 당시 양측은 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해 연 1~2%씩 올리기로 합의했다.

이후 2020년 초 코로나19가 확산되자 A지점은 심각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영화관에 대해 전부 또는 일부 휴관, 좌석 띄어 앉기, 5인 이상 예매 제한, 음식물 섭취 제한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이후 A지점의 월평균 관객 수·매출 등은 7~80% 급감했다. 재무제표에 따르면 코로나19 전인 2019년 75억 여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2020년 말 영업이익은 마이너스 20억 여원, 지난해에는 마이너스 16억 여원으로 나타났다.

이에 건물주와 각종 임대료 감액·유예 등의 합의를 맺었음에도 손실이 계속되자 A지점은 ‘차임증감청구권’(임대료를 깎아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을 행사했다. 이는 민법 628조에 규정된 내용이다. 해당 조항은 ‘임대물에 대한 공과부담의 증감 기타 경제사정의 변동으로 인해 약정한 차임이 상당하지 아니하게 된 때에는 당사자는 장래에 대한 차임의 증감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건물주(법무법인 세종 대리)는 이에 불응해 소송을 냈다. 법에 따라 임대료 감액을 청구한 것으로, 차임증감청구권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낸 시점부터 임대료의 50%를 초과해 지급된 부분을 건물주가 반환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법무법인 율촌의 소송수행팀. 왼쪽부터 이재근, 송영은, 김채린, 권효진 변호사. /율촌 제공

◇율촌, 사드 피해 면세점 사례부터 찾았다

사실 이 사건은 로펌 몇 군데를 떠돌았다. 원고가 대기업이었고, 민법 628조와 관련해 기각된 사례가 많아 어려운 소송으로 분류된 탓이었다. 사건을 수임한 율촌 소송수행팀(팀장 이재근 변호사)은 우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태 당시 청주공항 면세점 사례’ 분석에 나섰다.

체납액이 25억원 이상인 청주공항 임대 면세점들이 한국공항공사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서울고법 민사6부(당시 부장판사 이정석)는 2019년 임대료 5~60%를 감액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종래의 임대료를 고수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에 어긋나 부당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사드 보복조치로 2017년 3월부터 한국행 단체여행 상품의 판매 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고, 이로 인해 결국 국제선 운항편수·여객수가 급감해 면세점에 피해를 줬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 변호사는 “판례에 따라 민법 628조가 엄연히 살아있는 조항이라고 판단해 이 사건을 수임했다”며 “청주공항의 경우 1~2년 단위 단기 계약을 하기 때문에 장기계약 특성이 있는 영화관 업종에 해당 판례를 적용하기 위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영화관의 경우 △시설 설치 비용 △임대차계약방식 △한 곳에 다수가 밀집해야 하는 점이 면세점의 특성과는 다르다.

율촌은 또 ‘코로나 사태로 타격을 가장 심하게 입은 업종’이 영화관이란 점을 입증하고자 했다. 각종 데이터를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 2019년과 2020년, 2021년을 비교한 것이다. 그 결과 매출액·관람객 80% 급감, 대규모 영업이익 감소, 대규모 인원 감축 등이 수치로 나타났다.

이 변호사는 “실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A지점의 매출이 한 달 임대료보다 낮은 사례도 있어, 지속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이런 상황이 ‘사정 변경’에 해당한다는 점도 설명했다. 민법 628조에 근거해서다.

사정변경의 원칙은 계약 내용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부당하다고 인정될 경우, 계약을 해제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계약 당사자들은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할 때 신의와 성실로써 행동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파생됐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는 “대기업이 이 정도 경기 변동으로 임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이 변호사는 “코로나 사태는 영화업계에 경기 변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사정 변경으로 ‘사정변경의 원칙’이 적용돼야 할 사례”라며 “이미 2년간 본사가 30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봤고, 적자가 계속될 경우 고용 등 연쇄 부작용이 생긴다는 점을 재판부에 피력했다”고 말했다.

◇法 “임대인의 고통 분담, 상생에 도움”

재판부는 율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차임을 20% 감액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판시한 것이다. 경제사정 변동 등이 있음에도 기존 임대료를 유지하는 것이 정의와 형평에 어긋나 부당한 경우가 될 때 비로소 차임증감청구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재판부는 “임대차 특성상 계약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당초 약정했던 내용이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며 “대법 판례는 기존 약정 내용을 고수하는 것이 정의와 형평에 어긋나는 경우 계약 내용 수정을 허용하는 ‘사정변경 원칙’을 입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확실성을 감수하더라도 이 사건 계약상 임대료를 유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다.

그 근거로 ▲임대료가 관객 수 통계와 향후 예상 매출액, 인근 시세 등을 종합해 결정되는 점 ▲코로나19 대유행 등을 예측할 수 없던 점 ▲영화관에 대해 다수의 방역 조치가 시행된 점 ▲매출액, 영업이익, 월평균 관객 수가 감소한 점 ▲다른 영화관의 경우 임대료가 2~30% 감액된 점 ▲영화관 운용비용에는 변동이 없던 점 등을 제시했다.

이 변호사는 “특수한 상황에서 대기업이든 중·소상공인이든 법원이 개입해 적정 규모의 감액을 인정하는 것이 정의와 형평에 부합한다는 법리를 이끈 데 의의가 있다”며 “사법부에서도 임대인의 고통 분담이 ‘상생’에 도움이 될 것이란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이를 계기로 유사업종에서도 차임감액 합의가 활발히 이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율촌 소송수행팀= 법무법인 율촌의 소송수행팀의 팀장인 이 변호사는 2002년 서울지방법원을 시작으로 서울고법과 법원행정처 심의관, 대구지법 부장판사 등을 거치며 18년간 법관으로 재직했다. 이 변호사와 함께 송영은(37기) 변호사, 김채린(변호사시험 10회) 변호사, 권효진(10회) 변호사로 구성됐다. 마스크팩을 제조하는 ‘코스토리’라는 화장품업체와 면세점 대행업체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코스토리를 대리해 1·2·3심 모두 승소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