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6300억원. 작년 12월 16일,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상고심에서 승소한 근로자측이 돌려받게 될 소급분 추정액이다. ‘신의칙 적용’을 아예 배제하는 취지의 판결이 나온 것을 두고, 법조계에선 사실상 사법부가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반영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총 3편의 기획을 통해 그간의 통상임금 판례 흐름을 정리하고, 최근 대법원 판단의 한계와 비판에 대해 분석한다. 앞으로 기업의 노사간 임금협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도 짚어본다. [편집자주]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사건의 대법원 판결로 신의칙 적용 가능성이 희박해진 가운데 재계와 노동계의 관심은 통상임금 항목 중 ‘재직자 요건’(재직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이 어떻게 정리될지에 쏠리고 있다.
신의칙 판결 여파로 임금인상률을 높이려는 노조측과 어떻게든 소송까지 가지 않으면서도 합의안을 도출해내려는 사측간의 갈등이 첨예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뜨거운 감자’인 재직자 요건에 대해 사법부가 조속히 정리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신의칙 가능성을 제외하는 것이 업계의 ‘공식 룰’이 된 상황에서 임금 인상률에 대한 회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추후 재직자 요건 판례까지 사측에 불리하게 결정될 경우, 결국 노사협상 테이블에서 양측이 부딪힐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합의의 유연성이 낮아진 만큼 임금 교섭이 원활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재직자 요건은 통상임금 항목 중 가장 ‘뜨거운 감자’다.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계류중인 세아베스틸 사건의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재직자 요건 등 통상임금 항목이 보다 명확하게 정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원합의체는 중요 사건에 한해 하급심 판결이 엇갈리거나 판례 변경 가능성이 있는 경우 열린다.
앞서 서울고등법원 민사 38부는 2018년 12월 세아베스틸 사건에서 재직자 조건 설정 자체가 무효라고 판단했다. 당시 재판부는 “정기상여금에 부가된 재직자 조건은 무효”라며 “정기상여금에 일방적으로 재직자 조건을 붙이는 것은 이미 발생한 임금을 일방적으로 지급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했다. 2019년 5월 기술보증기금 사건에서도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는 기존 다수 판례를 근본적으로 뒤집은 것이라 큰 파장을 불렀다.
당초 대법 전원합의체는 2013년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하는 임금(재직조건부 임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재직조건부 임금의 지급 조건은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일 것’이다. 하지만 해당 근로자가 불특정한 임의의 날에 초과근로를 제공한다면, 그 시점에 지급조건이 성취될지 여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통상임금의 요건인 ‘고정성’이 결여됐다고 판단했다.
이후 다수 하급 판결들은 이러한 법리를 정기상여금에도 적용했다. 즉, 재직조건부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판단해왔다. 실제 많은 회사에서 상여금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항목 수당에 대해 고정성 요건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재직자 조건을 부가, 통상임금성을 회피해왔다.
따라서 만약 대법원이 재직자 조건의 효력을 부정한 서울고등법원 판단을 따를 경우, 사업장마다 추가 통상임금을 요구하는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개로 또 다른 판결들도 엇갈리고 있다.
대법원 제3부는 2020년 4월, 주식회사 효성 생산직 근로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소송에서 관행적으로 재직자에게만 상여금을 지급해왔다면 재직자 요건이 인정됐다고 봤다. 즉, 그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은 2020년 12월 2일 “노사가 단체협약 등에서 어떤 임금에 관해 재직자 조건을 부가했다고 해서 그것을 무효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정기상여금에 지급에 관한 조건 내지 중도 퇴직자에 대한 정산의 방식으로 재직자 조건이 부가돼 있다 하더라도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봤다.
대법원 노동법 실무연구회 소속인 법무법인 화우의 홍성 변호사는 “신의칙도 중요하지만 결국 통상임금 항목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임금 구조가 더욱 명확하게 개편될 것”이라며 “조만간 재직자 요건 관련 내용을 전원합의체에서 정리를 해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율촌 노동팀 최진수 변호사도 “기업 입장에서 신의칙 판단이 사실상 정리됐다는 점에서 이제 남은 것은 재직자 조건이고 유일하게 싸워 볼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중공업 대법 판결 직후, 대형 로펌에 쏟아진 기업들의 문의는 신의칙 관련 문의보다는 ‘재직자 요건은 어떻게 될 전망이냐’는 것이었다.
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기존에 재직자 조건이 설정돼 있는 것은 전부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처리를 해왔는데, 대법 전합 판결이 통상임금이라고 판결하면 소송이 들어올텐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문의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