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에서 전환사채(CB)가 시세 조종의 온상으로 지적되지만, 정작 금융당국이 CB를 규제할 수 있는 수단은 마땅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상장사가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하는 CB를 인수한 세력은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CB 투자자가 전환청구권을 행사한 뒤 부당 이득을 얻고 나면 주가는 급락하고 투자 피해가 이어지지만, 한국거래소를 비롯한 당국이 이를 규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전문가들은 CB 전환과 신주 상장 과정에서 불공정 행위가 의심될 경우 이를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세 조종이 의심되는 경우 신주 상장을 늦추도록 당국이 개입하거나, 금융감독원이 기존 투자자 권리를 침해하는 유상증자를 집중 심사하듯 CB 전환청구권 행사 여부를 심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CB를 조기상환 받은 후 재매각하려면 주주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방법도 대책 중 하나로 언급된다.
자본시장 업계 관계자는 “현행 제도에서는 CB가 한번 발행되면 전환청구권 행사까지 ‘브레이크’가 없는 상황”이라며 “금융당국이든 주주총회든 불공정 거래가 의심되면 CB가 주식으로 전환, 신주가 상장되는 과정에서 제동을 걸 수 있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CB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상장사가 무분별하게 찍어낸 CB가 주가 조작에 악용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 2023년 발표한 ‘사모CB 악용 불공정거래 기획조사’에 따르면 전환한 신주를 고가에 매도할 목적으로 주가를 의도적으로 부양해 부당 이득을 얻은 사례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신약개발사인 A사 투자자들은 코로나19 치료제의 임상시험 통과 가능성을 허위로 홍보해 CB 전환주식을 비싼 가격에 매도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채권으로 발행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해진 가격의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CB는 이사회 의결만으로 발행할 수 있다. 채권자가 주식으로 전환을 청구하면 새로 발행된 주식은 한 달 이내에 회사가 상장 날짜를 결정한다. 새로운 주식이 상장되면 기존 주식 가치는 훼손되지만, CB 발행과 신주 상장은 회사의 결정만으로 이뤄지는 셈이다.
게다가 CB를 인수한 세력이 의도적으로 시세를 조종한 정황이 의심되더라도 한국거래소를 비롯한 금융당국이 신주 상장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CB 전환청구권 행사로 발행된 신주는 회사가 상장 날짜를 지정해 예탁결제원에 등기를 하면 이뤄지는 구조”라며 “거래소가 CB 상장 일자를 연기할 수 있는 경우는 가처분신청 같은 소송이 제기되는 등 법적 공방이 있을 때뿐”이라고 설명했다.
주가 조작에 정통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최근 주가조작 세력이 주식을 매집하는 방식은 대부분 CB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며 “바지 대표를 내세운 투자조합으로 CB를 매수하면 당국의 조사를 피하기도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이미 한국거래소는 시세 조종이 의심되는 종목에 대해 거래를 정지하거나, 거래 계좌 거래를 막는 등 권한을 갖고 있다. 다만 종목 거래 중지는 일반 투자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계좌 중지는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지금 제도만으로는 CB를 활용한 불공정 거래에 발빠르게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자본시장 업계의 한 관계자는 “CB 전환청구권은 개인의 재산권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또 다른 관계자는 “다른 투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규제 도입에 법적인 문제는 크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주가 조작 엄벌을 거론한 만큼, 지금이 도입 적기”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