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상장사가 교환사채(EB) 발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새 정부가 자사주를 의무적으로 소각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EB를 발행해 선제적으로 자사주 유동화에 나선 것이다. 자사주를 담보로 우호적인 상대에게 EB를 발행하면, 회사는 현금과 동시에 우호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사 SKC(011790)는 지난달 말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총 3100억원 규모의 영구 EB로, 교환 대상은 SKC가 보유한 자사주 약 299만주다. SKC는 이번 자금 조달을 통해 재무건전성을 강화하고 신사업을 가속하겠다고 밝혔다.
SK그룹은 자사주 보유량이 많은 편이다. 특히 지주회사 SK는 자사주 지분이 25%에 달한다. 그룹 차원에서 밸류업 정책을 열심히 하겠다고 강조하면서도 자사주 소각을 공식화하지 않아 투자자들은 불만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SKC가 EB를 발행한 것이다.
교환사채(EB·Exchangeable Bond)란 발행회사가 보유한 주식(자사주 또는 타사주)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사채를 말한다. 사채권자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보유한 채권을 발행회사가 보유한 자사주와 교환할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현금을 확보할 방법이다. 기존 주식을 내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신주 발행에 따른 지분 희석 우려도 없다. 아울러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라도 제3자에게 처분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발행 회사는 자사주를 담보로 한 EB를 계열사를 비롯한 우호 세력에 매각해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지난달 SKC를 비롯해 SNT홀딩스(036530), SNT다이내믹스(003570), LG화학(051910) 등 코스피 상장사가 자사주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EB 발행에 나섰다. 이달 들어서는 지난 2일 바른손(018700)이 EB 발행 계획을 공시했다. 지난달 13일부터 이달 2일까지 EB 발행 공시는 모두 9건 나왔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한 건도 없었다.
일각에서는 대선 이후 차기 정부가 자사주 소각과 관련한 규제를 강화하기 전에 상장사들이 선제적으로 EB를 발행해 자사주를 처분하고 있단 분석이 나온다. 소각 대신 EB를 통해 현금화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개별 기업의 사정을 모두 알 수는 없다”면서도 “국내 상장사들이 자사주 소각 규제가 나오기 전 교환사채를 통해 자사주를 처분, 선제적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경영권을 보호하려는 모습”이라고 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하는 것이 맞지만, 자사주를 활용하는 것 외에 현실적으로 국내 상장사가 가진 경영권 방어 수단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고 짚었다.
지난해 밸류업 정책이 시행되기 전에도 유사한 논란이 있었다. 일부 상장사들이 자사주 보유 목적과 처분 계획에 관한 공시 의무를 피하기 위해 EB로 자사주를 먼저 처분했단 지적이다. 당시 농심은 18년 만에 보유 자사주 전량을 EB로 처분하겠다고 밝혀, 규제를 우회했단 비판을 받았다.
자사주를 최대주주에 넘기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 솔루엠(248070)은 최대주주인 전성호 대표이사에게 자사주 118만주를 매각한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당시 회사는 최대주주의 책임 경영을 위한 것이라고 공시했으나, 취득 단가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자사주를 넘긴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배임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지난달 자사주를 전량 소각한다고 정정공시했다.
같은 계열사에 자사주를 매각하는 움직임도 나온다. 자사주를 제3자에게 매각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나 경영권 방어에 활용할 수 있다. 코스피 상장사 사조대림(003960)은 지난달 보유한 자사주 약 절반을 계열사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회사는 운영자금을 확보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영학과 교수는 “자사주는 회사의 자산이기 때문에 의결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소각 의무화가 임박하자 경영진이 자신의 투자분이 아닌 자사주로 우호 지분을 늘리는 것은 주주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