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e스포츠 리그오브레전드의 젠지와 OK 저축은행 브리온의 경기. 이날 젠지는 1~2라운드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지만, 별다른 세리머니를 하지 않고 퇴장했습니다. 선수들이 주로 하는 ‘브이(V·victory·승리)’ 포즈가 대통령 선거 기간 ‘기호 2번’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구단에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해외판 ‘충격 소식’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만한 이야기지만, 당시 연예계 상황을 보면 현명했다는 대처입니다. 에스파 카리나와 홍진경, 빈지노는 빨간 옷 입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사과해야 했습니다. 원더걸스 출신 배우 안소희는 빨간 장미 사진, 개그맨 박성광은 파란 지붕이 보이는 창밖 사진을 게재했다가 해명에 나섰습니다.
보이그룹 세븐틴, 라이즈 등은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보며 V포즈를 취하다가 멈칫하는 화면들이 잡혔습니다. 광기 어린 팬덤과 정치에 중독된 대한민국이 만들어 낸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57번째 이야기입니다.
<1>팬들의 이상을 투영하는 ‘문화적 백지’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K팝 아이돌들이 직면하는 극도의 정치적 중립 압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기대가 워낙 높아, 아이돌들은 우연이라 할지라도 잘못 해석될 수 있는 색상, 숫자, 손짓까지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 같은 극단주의는 K팝 아이돌들이 개인의 의견이나 성향을 가진 개인이 아닌, 팬들의 이상을 투영하는 ‘문화적 백지(cultural blank slates)’로 기능해야 한다는 깊이 내재된 사회적 기대에서 기인한다.”
아이돌(idol)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우상’, 신이나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 아이돌에게 정치인보다 더 높은 도덕적 잣대를 요구한 이유로도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아이돌이란 우상보다 인디펜던트가 지칭한 ‘팬들의 이상을 투영하는 문화적 백지’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그들을 개인의 의견이나 성향을 가진 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팬들이 컨트롤하고, 팬들의 이상과 꿈을 투영하고 실현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유사 연애 감정을 넘어선 스타와의 동일시 감정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발생해도 문제라고 비판 받을 감정이 팬과 스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지적이 나오면 일부 팬들은 말합니다. “그런 거 조심하라고 돈 많이 버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그들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조심해야 할 색은 국민의 힘(빨강), 민주당(파랑), 개혁신당(오렌지색), 녹색정의당(노랑과 초록) 등 대부분의 기본색입니다. 손가락 V나 엄지 척 등도 특정 정당을 연상시킬 수 있다며 자제하도록 권고됩니다. 선거 기간 사진을 흑백으로 올렸다고 ‘개념 있다’라는 말을 듣는 상황입니다. 과연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2>기대를 배신하면 파시즘적 비판
물론, 생각은 자유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기대를 갖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반응은 과도합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의 관련 기사에서 네티즌들은 “한국 스타에 대한 팬들 반응은 ‘파시즘(급진적인 전체주의)’ 같다”고 비판합니다.
“한국 연예인들은 거의 불가능한 삶을 삽니다. 항상 젊어 보여야 하고, 절대 연애하면 안 되고, 늘 날씬해야 하며, 조금만 실수해도 장례식 근조 화환을 받거나 사라지게 됩니다.”<영국 AJPhoenix>
“왜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삶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죠? 현실을 인정하고 환상은 혼자 가지세요.”<미국 Dani>
“이 팬이라는 사람들은 연예인들을 자기 소유물로 착각하는 집착증 환자들입니다.”<영국 dmcritical >
데일리 메일은 이런 한국 연예계의 과함은 비단 정치적 상황뿐만이 아니라고 분석합니다. 연애,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도 ‘배신’ 등의 발언으로 과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국내 연예계에는 “아이돌에게 바라는 도덕성이 정치인보다 더 높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현역 톱급 아이돌들을 장관 청문회 내보내도 논란 없이 통과할 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데일리 메일은 “한국 연예계가 스타들의 생활을 철저히 통제해온 전통과 연관이 있다”며 “과거 K팝 스타들은 연애는 물론 휴대폰 소지조차 금지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소속사가 아티스트들의 휴대폰과 몸무게 등을 단속하는 걸 “비인간적이다”며 목소리 높여 비판하던 팬덤이 이제는 소속사보다 더 강한 통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일리 메일은 “최근 K팝이 글로벌 현상이 되면서 해외 팬들은 이러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비판적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3>연예인과의 감정적 밀착…다음 단계로 진화해야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먼저, 연예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연예인은 단순한 유명인을 넘어 팬덤과 대중 여론을 크게 좌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정치적 입장 표명이 있을 경우 팬덤 내의 분열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웬만한 정치인보다 파급 효과가 큽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티스트에게 가지는 강한 정서적 애착 관계입니다.
월드 파퓰레이션 리뷰에 따르면, 전 세계 자살률은 한국이 그린란드, 가이아나, 리투아니아에 이어 4위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는 1위입니다. 그 이유로 사회적 고립에 따른 정신 건강 문제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외로움’이 스타와 팬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해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한국 정치 역사로 인한 경계심입니다. 흔히 한국은 정치에 중독된 사회라고 합니다. 한국은 남북 분단과 이념 갈등이 70년 넘게 지속된 정치적으로 분열된 사회였고, 정치적 입장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커리어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또한 압축적 성장과 급격한 민주화 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정치라는 것이 더 민감하고 빠르게 받아 드려집니다.
물론 이런 한국 정치의 다이내믹에 대해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한국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빠른 경제 성장도 ‘양극화’라는 부작용이 나오는 것처럼, 빠른 문화 발전 역시 ‘K컬쳐’라는 성장을 이뤘지만, ‘팬덤과의 감정적 애착’이라는 부작용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연예인을 한국의 경쟁적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표적으로 삼기도 합니다.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며 ‘한 명만 걸려봐라’라고 대상을 찾습니다. 작은 도덕적 잘못이 과장된 비난과 처벌을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를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 정치 뿐만 아니라 팬덤 문화도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