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성규·DALL·E 3

세계 1위 배터리 기업인 중국 CATL이 20일 홍콩 주식 시장에 입성한다. 이미 중국 선전 시장에 상장돼 있지만,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에 또 상장하면서 글로벌 주식 시장에 본격적으로 데뷔하는 것이다.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지난 12~14일 전 세계 기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수요 예측을 벌였는데, 쿠웨이트투자청, 카타르투자청, 중국 시노펙 등 기관 투자자들의 수요가 몰리면서 회사 측은 공모 규모를 여러 차례 확대했고, 총 1억1790만주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공모 가격도 희망 범위 최상단인 주당 263홍콩달러(약 4만7000원)로 확정됐다. 이에 따라 이번 기업 공개로 CATL은 최대 53억달러(약 7조4100억원)를 모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홍콩 주식 시장 기준 2021년 이후 4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이자, 올 들어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상장이 치러지는 셈이다.

그래픽=김성규

◇“중국은 좁다”…홍콩 상장하는 배터리 황제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와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점유율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리는 CATL은 2018년 ‘중국의 나스닥’으로 불리는 중국 선전증권거래소의 창업판에 이미 상장돼 거래 중이다. 그러나 사세가 확장되면서 해외 투자 유치 필요성이 커지자, 글로벌 투자자들의 접근성이 높은 홍콩 증시에도 문을 두드리게 됐다. 이렇게 중국 상하이·선전 시장과 홍콩에 중복 상장을 신청한 기업은 올해만 30곳에 달한다.

CATL은 이번에 홍콩에서 대규모 IPO로 투자금을 모아 확보한 신규 자본의 약 90%를 헝가리 공장에 사용할 계획이다. 중국 테크 기업들을 담은 액티브 상장지수펀드(ETF)를 운용 중인 김남호 타임폴리오자산운용 부장은 “중국 시장에 머무르던 대표 배터리 기업이 홍콩이라는 국제 시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국 정부가 ‘중국 기술 기업의 글로벌화’를 목표로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돈은 됐습니다” 배짱 부리는 이유

CATL의 홍콩 주식 시장 입성이 주목받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배터리 1등 기업은 이번 IPO를 미국 내국인 투자자를 제외하고,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대한 서류 제출 의무를 면제하는 이른바 ‘레귤레이션 S’ 방식으로 진행한다. 미국 밖에 역외 계좌를 보유한 미국 대형 기관 투자자들은 우회해서 이번 IPO 물량을 매입할 수는 있지만, 미국 내 개인들의 투자 자금을 보유한 미국 뮤추얼펀드 같은 일부 투자자는 주식 매입이 불가능하다.

블룸버그는 “홍콩 증시의 대규모 IPO에 미국 내국인 투자자가 참여할 수 없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미·중 무역 전쟁 등 양국 간 갈등이 IPO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는 “CATL이 미국 법적 책임에 대한 노출을 제한하기 위해 이번 변경을 결정했으며, 일부 미국 투자자들이 상장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CATL에 대한 투자자들의 수요는 충분하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지난 3월 미 국방부는 CATL, 텐센트 등이 중국 정부의 민군 융합 전략에 따라 첨단 기술과 전문성을 활용해 중국군 현대화를 지원하고 있다고 보고, 이들을 ‘중국 군사 기업’ 명단에 추가했다.

당장 제재나 수출 통제 등의 제약을 받지는 않지만, 장차 미 국방부와 거래 등은 금지될 전망이다.

◇점점 더 앞서가는 1위…고전하는 K배터리

CATL이 홍콩 시장에서 모은 신규 자본의 약 90%를 헝가리 생산라인 건설에 투입한다는 것은 유럽 완성차 시장 공략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전략이다.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CATL과 BYD를 합친 중국 배터리 ‘빅2′의 시장 점유율은 작년 말 51.4%에서 올 들어 2월 기준 55.1%로 높아졌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등 K배터리 3사의 합계 점유율이 같은 기간 23.2%에서 17.7%로 뒷걸음친 것과 반대다. CATL의 규모는 가장 큰데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해 격차는 더 벌어지는 중이다.

노우호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CATL은 중국 내수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기차·ESS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갖췄고, 로보틱스에서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까지 신규 수요처에 대한 선제적 기술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여러 주가 평가지표가 경쟁 기업들에 대비해 저평가된 만큼 홍콩에서 재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귤레이션S

미국 증권법에서 규정한 해외(비미국) 증권 발행 규정 중 하나로, 미국 증권법의 규제를 면제해주는 대신 미국 내 투자자의 참여를 제한한다. CATL의 경우 해외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모으는 동시에 미국 시장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레귤레이션S 상장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해외 기업이 미국 시장에 상장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규제를 받는 ADR(주식예탁증서)과 반대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