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상장사 A사는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연대가 제안한 인물을 상근감사로 선임했다. 선임된 감사는 견제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상장사 이사회는 4명으로 구성됐는데, 사외이사 1명을 제외한 3명이 대표이사와 친인척 관계다.
그런데 신임 감사가 막상 출근하고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회사가 내부 경영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고, 회계 자료 열람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최근 주주 행동주의가 확산하며 주주제안으로 선임된 인사가 상장사 이사회에 진입하는 사례가 늘었다. 하지만 선임된 이사나 감사가 기업 자료를 요구하면 회사 측이 거절하거나 주요 결정 사안을 공유하지 않는 등 실질적인 경영 참여에 제약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 인사가 이사회를 통해 회사 경영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구조인 셈이다.
외부 인사를 받아들인 회사 입장에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경영상 기밀을 어디까지 공유해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해당 인사가 단기적인 주주 이익 확대가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펀드 스트라이드파트너스 역시 비슷한 사례를 겪고 있다. 스트라이드파트너스는 올해 3월 열린 건강기능식품 전문기업 에이치피오(357230) 정기 주총에서 주주제안을 통해 남중구 감사위원 선임안을 통과시켰다. 지난달 정식 미팅을 한 번 진행했고, 아직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앞으로 회사가 새로운 감사위원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스트라이드파트너스 측은 “새로 선임된 감사위원을 회사가 다양한 방법으로 배제하는 비협조적인 사례들이 많아 우려하고 있다”며 “감사는 독립적이어야 하는 만큼 우리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지만, 회사가 감사위원을 주요 의사 결정에서 배제하는 상황에 대해 대응 방안을 준비해 놓았다”고 말했다.
감사는 회사의 회계 및 업무에 대해 조사 권한이 있어 회사가 이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한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내이사 역시 회사의 업무에 대한 공동 책임과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한이 있어 배제 시 법적 분쟁 가능성이 있다. 만약 회사가 부당하게 이들의 자료 요청을 거부하고 경영 참여를 제한할 경우 금지 가처분 등 소송으로 대응하거나 금융감독원 등 관계 기관에 민원 또는 조사를 요청하는 방법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주주제안으로 선임된 이사·감사가 요구하는 자료의 범위와 방식이 지나쳐 기업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회사는 선임된 이사 또는 감사에게 정당한 범위 내 자료를 제공할 책임이 있지만, 과도하거나 모호한 요구는 책임 있는 감시가 아닌 회사 내부의 분란 유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상 기밀이 유출될 위험도 있다.
유통·건설업체인 코스닥 상장사 B사는 지난해 주주제안으로 선임된 상근감사의 자료 요구가 과도해 업무에 지장이 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가능한 자료는 모두 주고 있지만, 다음 날까지 3개년 치 특정 사업 자료를 달라는 등의 요구는 바로 수용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B사 관계자는 “최근에는 외부감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하며 횡령·배임이 의심되니 관련 자료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을 해보자는 요청이 있었다”며 “사업보고서까지 문제없이 공시된 상황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라고 말했다.
한국ESG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정기 주총 시즌 상장사 685곳의 안건을 분석한 결과 주주제안 안건은 총 117건으로 작년(52건)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그중 임원 선임 관련 제안이 61건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사외이사 선임안 등 경영진에 대한 견제 목적의 제안이 다수였다.
주주제안을 통한 이사·감사 선임이 늘어나는 만큼 대량의 자료를 요구할 경우 이사회 내에서 일정, 범위, 목적에 대해 협의를 진행하거나 감사인의 역할 범위를 내부 규정으로 명시하는 대안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코스닥협회 관계자는 “회사가 사내이사나 감사 등이 요구한 정보를 주지 않기는 힘들다”며 “다만 회사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자료일 때 주주 측에서는 회사가 비협조적이라고 느끼거나 거부당했다고 인식하는 등 오해가 있을 수 있어 관련해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