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자금 수요가 늘었지만 자금 조달 문턱은 되레 높아지면서 상장사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유상증자에 필요한 증권신고서 검토를 강화하면서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 조달 기간이 길어졌다. 당장 자금이 필요한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주주(투자자) 보호를 위한 조치라지만, 기업은 심사가 과도하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2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차바이오텍(085660)은 지난 8일 유상증자 발행가액을 확정하고 오는 6월 3일부터 청약을 시작한다. 차바이오텍이 처음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한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이후 정정 공시만 여섯 차례 반복한 끝에 4개월 만에야 유상증자를 추진하게 됐다.
기업은 대출을 받거나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지만, 오랜 경기 침체와 고금리 여파로 유상증자를 선택하는 기업이 늘었다.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4월 18일까지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한 상장사는 코스피 33곳, 코스닥 127곳으로 전년 대비 69% 증가했다.
금감원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양(001570) 등을 대상으로 이미 유상증자 심사를 강화한 탓에 감사보고서 제출 이후로 유증 일정을 미룬 곳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최근 유증 공시가 더 많아졌다고 현장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유상증자에 나서는 기업은 늘어나는데 금감원의 심사는 깐깐해지면서 심사 ‘대기 줄’이 길어졌다.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한 상장사는 늘었지만, 같은 기간 실제로 유상증자가 진행된 건수는 오히려 감소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유상증자가 이뤄진 건수는 코스피 19건, 코스닥 105건 등 총 124건이다. 전년 같은 기간(128건) 대비 소폭 감소했다.
주주배정 유상증자는 일반적으로 기업이 증권신고서를 제출하고 7일 뒤에 효력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금감원은 기업의 무분별한 유상증자 억제와 투자자 보호를 위해 유상증자 공시를 심사하고, 내용이 부실하다면 보완을 요구한다. 금감원이 정정을 요구하면 효력 발생 기한이 정지되고 회사는 이를 정정해 다시 보고를 올려야 한다. 그만큼 기업의 자금 조달 시기도 뒤로 밀린다는 뜻이다.
지난달 20일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012450)도 차바이오텍만큼은 아니지만 진통을 겪고 있다. 이 회사 역시 2번에 걸쳐 금감원의 정정 요구를 받았다.
업계에서는 금감원이 과도한 심사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금감원이 투자자 권익 보호를 위해 유상증자 심사를 강화하려는 의도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기업이 제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균형점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실제 한 코스닥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하반기쯤 유상증자를 검토하려 했었다”면서 “장기간 지연될지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 슬슬 착수해야 하지 않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금감원은 기업의 유상증자 계획과 자금 사용 목적이 투자자에게 잘 설명됐는지, 공시 서류가 규정에 맞게 제대로 작성됐는지 볼 뿐이란 입장을 밝혔다. 투자자에게 관련 정보만 제대로 전달한다면 유상증자를 막거나 지연시킬 이유가 없다는 게 금감원 설명이다.
금감원 설명대로 모든 기업의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 발행 주식의 90%에 달하는 신규 주식을 발행하는 형지I&C(011080)의 유상증자는 승인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을 깨고 약 3주 만에 금감원 문턱을 넘었다. 형지I&C는 유상증자 발표 이후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테마주로 엮이면서 주가가 폭등하며 논란이 일었다. 금감원은 중점심사 대상으로 형지I&C의 유상증자 계획을 살폈으나, 자진 정정으로 서류가 보완되면서 지난 11일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의 효력을 발생시켰다.
금감원 관계자는 “심사 원칙은 어디까지나 투자자 보호 조치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여부”라며 “이 원칙에 입각해 충실히 심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