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디지털자산 산업에 대응하기 위해 규제와 진흥을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에 속속 나서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여전히 규제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이슈로 떠오른 ‘1거래소-1은행 규제’와 관련해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27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도 가상자산업계의 대표적인 그림자 규제로 꼽히는 1거래소 1은행 규제가 논의에 올랐다. 이는 가상자산 거래소가 실명계좌 발급을 위해 반드시 한 개의 은행과 1:1 제휴를 맺어야만 하는 구조다. 그러나 해당 규제는 시스템 리스크와 시장 불균형을 초래하면서 글로벌 흐름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거래소와 은행이 독점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서 시스템 안정성에 취약해질 수 있다. 제휴 은행에 문제가 생기거나 계약이 종료될 경우, 해당 거래소는 실명계좌 발급이 중단돼 운영 자체가 차질을 빚게 된다. 실제로 일부 중소 거래소는 은행과의 제휴 실패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실명계좌 없는 ‘지갑 서비스’만 유지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로 인해 소수의 대형 거래소만이 생존하고, 시장의 다양성과 공정경쟁은 위축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불편과 피해가 따른다. 거래소 선택이 사실상 계좌 제휴 은행에 의해 제한되다 보니, 실질적인 소비자 선택권이 사라지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경쟁 없는 독점적 지위에서 수수료나 서비스 개선 압박 없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어, 서비스 품질 역시 경쟁 체제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규 거래소의 시장 진입 장벽도 높다. 엄격한 제휴 요건과 은행 측 리스크 회피 기조로 인해 초기 거래소들이 실명계좌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대형 거래소 중심의 과점 구조가 고착화되는 구조다. 이는 한국 디지털자산 생태계 전반의 활력과 혁신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해외는 이와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거래소가 복수의 은행과 제휴하거나 자체 결제 및 송금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제휴 은행 수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일본 또한 거래소가 KYC(고객신원확인), AML(자금세탁방지) 기준을 준수하는 조건 아래 은행과의 제휴 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자금세탁 방지 지침(AMLD)을 기반으로 투명성과 내부 통제를 요구하지만, 거래소의 제휴 은행 수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아울러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접근 장벽 역시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은 2017년 ‘가상통화 관련 긴급대책’ 이후 비거주 외국인의 국내 가상자산 거래 계좌 개설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이는 법률에 근거한 조치가 아닌 행정지침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며 외국인의 시장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이러한 폐쇄적 구조는 단지 외국인 투자자 차단에 그치지 않고, 국내 디지털자산 시장의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부작용이 ‘김치프리미엄’ 현상이다. 국내에서의 높은 수요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제한되다 보니, 글로벌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이는 시장 가격의 변동성을 키우고, 건전한 거래 질서를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나아가 외국인 투자 유입이 막히면서 외화 유입 기회와 세수 확대 가능성 또한 상실되고 있다. 디지털자산 시장의 특성상 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국경 없는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국내 거래소를 이용해 디지털자산을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수수료 수익, 부가가치세, 법인세 등 다양한 형태의 국부 창출이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외국인 거래를 제한 없이 허용하고 있다. 미국의 코인베이스, 크라켄, 일본의 비트플라이어 등 글로벌 거래소는 자국의 고객확인(KYC) 및 자금세탁방지(AML) 절차만 충족하면 외국인에게도 동일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자산의 글로벌 속성을 인정하고,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향적 조치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도 외국인 투자자의 단계적 허용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컨대 국내 거주 외국인(2023년 기준 약 246만 명)부터 실명계좌 개설 및 거래를 허용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비거주 외국인까지 확대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제안이다. 이를 통해 시장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외화 유입과 세수 확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