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허위 서류에 흔들리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부터 국책은행까지 대출 심사 과정에서 허위 서류를 걸러내지 못해 수백억원 단위 금융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중이다. 은행 업무가 전산화되고 내부 통제가 엄격해지고 있으나 허위 서류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환경은 마련되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허위 서류를 쉽게 적발할 수 있도록 촘촘한 시스템 개발을 서두르는 동시에 은행 직원 개개인의 견제와 감시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74억원대 금융 사고가 발생했다고 지난 23일 공시했다. 하나은행 영업점 직원이 여신 거래처로부터 금품을 받고 허위 서류 기반으로 대출금을 더 내준 사실이 적발됐다. 이 직원이 거래처에 집행한 부당 대출은 74억7070만원에 이른다. 금융감독원은 해당 사실을 보고받고 하나은행에 대한 수시 검사에 착수했다.
허위 서류로 인한 금융 사고는 최근 여럿 발견된다. 금감원은 IBK기업은행에서 7년 동안 882억원에 달하는 부당 대출이 발생했다고 지난달 밝혔다. 기업은행 부당 대출에도 허위 서류가 대출 실행의 ‘마패’ 노릇을 했다. 전직 기업은행 직원이 대출 증빙 및 자기자금 관련 서류를 가짜로 작성했고, 이 전직 직원의 배우자이자 현직 기업은행 직원이 대출을 승인하면서 은행 돈이 새 나갔다.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친인척이 연루된 2300억원대 우리은행 부당 대출 사건에서도 은행이 허위 서류 진위 파악을 생략한 사실이 드러났다.
허위 서류로 인한 부당 대출은 개인의 일탈 혹은 영업점 한 곳의 실책으로만 보기 힘들다는 게 금융권의 중론이다. 허위 서류를 점검할 자동 시스템은 미흡한 반면 직원을 투입해 일일이 서류를 들여다볼 수 없으니 검증 공백이 생기고 사고가 난다는 게 은행들의 설명이다. 공공기관이 발급하지 않은 가짜 서류는 은행 전산상 공공 시스템과 연동한 데이터 확인을 거쳐 자동으로 걸러낼 수 있다. 그러나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거나 의도적으로 담보 가치를 부풀려 감정평가 서류를 받는 등, 공인된 문서만 받아내면 은행 전산을 속일 수 있다. 이때는 은행 직원이 하나하나 서류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은행들은 실제 영업점 현장에서 팀장이나 지점장이 모든 서류를 하나하나 검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전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영업점 내 대출 결재권자가 기업을 실사하거나 하다못해 기업 대표를 만나 면담하면서 서류의 허위 여부를 파악하면 가장 완벽할 것”이라면서도 “업무는 쏟아지고 대출 1건에 쏟을 시간은 제한돼 있으니 부하 직원을 믿고 결재를 내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금감원도 허위 서류로 인한 금융 사고 반복을 인지하고 지난해 12월 개선 방안을 내놓았다. 금감원은 대출 심사에 쓰이는 계약서상 중요 사항의 누락 및 오기입 여부 확인 의무를 은행권 자율 규제에 담도록 지도했다. 또한 은행의 외부 감정 평가 의뢰 시 전산상 무작위로 감평사를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은행 직원이 특정 감평사에 의뢰해 담보 가치를 부풀리고 허위 서류를 만드는 행위를 막는 조치다.
전문가들은 금감원의 이 같은 제도 개선은 환영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은행 직원 개개인이 제도를 성실하게 준수하도록 상호 감시하는 조직 문화도 다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지열 한양대 경영교육원 교수는 “은행의 허위 서류 검증 전산 개발과 직원 윤리 교육 강화는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며 “윤리 교육이라고 해서 따분한 강의만 실시하는 게 아니라 준법 제보 활성화 등 금융 사고 확산을 바로 막을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수용 금융연수원 교수는 “내부 통제 문화가 은행 직원 개개인의 이익과 연관이 되게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단순히 금융 사고 0건을 목표로 삼을 게 아니라 동료를 견제해 금융 사고를 조기에 적발한 직원에겐 상을 주고, 견제 기회를 놓쳐 대규모 금융 사고를 방치했다면 벌을 주는 인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