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의 큰손’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시장 진출 의지를 드러냈다. 연금개혁으로 기금 고갈을 늦출 순 있어도 피할 순 없는 국민연금 입장에서 400조 퇴직연금 시장은 생명 연장을 위한 최선의 선택지란 해석이 나온다. 정치권과 정부로서도 강력한 메기를 푼다는 측면에서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시나리오다. 민간사업자들은 국민연금의 영토 침범을 우려하고 있다.
19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최근 공시한 ‘2024년도 국정감사 시정·처리 요구사항 결과보고서’에서 “공단이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다”며 “국회의 법안 논의 결과에 따라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해 국민연금이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하라”는 국정감사 요구사항에 대한 국민연금의 답변이다. 작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은 “사적연금의 주축을 이루는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가 우리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낮은 수익률”이라며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퇴직연금은 계약형과 기금형으로 나뉜다. 계약형은 회사나 근로자가 직접 퇴직연금 사업자(금융회사)와 계약하는 방식이다. 기금형은 퇴직연금 관리를 노·사·외부 전문가 3자로 구성된 수탁 법인(기금운용 조직)에 맡기고, 내부 기금운용위원회를 통해 연금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국내 퇴직연금 제도는 2022년 도입된 중소기업 퇴직연금 기금(30인 이하 사업장)을 제외하곤 계약형으로 운영된다.
문제는 국내 퇴직연금 시장이 400조원 규모로 커졌는데도 적립금의 90%가 원금 보장형 상품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현 상태로는 노후 보장이 전혀 안 된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계약형 대신 기금형 퇴직연금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최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고용부는 퇴직연금 기금화와 관련한 연구용역을 실시한 뒤 연내 관련 법 개정 작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려면 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간 국민연금은 기금형 퇴직연금 진출과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해 왔다. 이번 국정감사 요구사항 결과보고서에서도 즉답을 피하긴 했으나, 업계 관계자들은 우회적으로 진출 의지를 드러낸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했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여야 이견이 없고, 정부도 반대하지 없고, 국민연금 스스로도 새 먹거리를 창출할 기회인데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며 “정부로선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의 메기로 등장하면 시장 전체 사이즈가 커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고, 민간 금융회사의 수익률 극대화 노력도 유도할 수 있다”고 했다.
여야는 국민연금의 기금형 퇴직연금 진출을 가능하게 하는 법안을 사이좋게 발의해 뒀다. 작년 8월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대표 발의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일부개정안’과 올해 2월 한지아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있다.
기금 고갈이란 예정된 미래를 앞둔 국민연금으로서도 기금형 퇴직연금 시장 진출은 조직의 ‘생명 연장 꿈’을 이룰 기회다. 현재 한창 논의 중인 연금개혁 방안은 기금 고갈 시기를 기존 시점(2056년)보다 16~17년 더 미루는 방안일 뿐 근본적인 개혁안은 아니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으로선 생존의 맥락에서 퇴직연금 시장 진출을 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큰손의 퇴직연금 시장 진출이 달갑지 않은 쪽은 그동안 치열하게 점유율 경쟁을 벌여 온 민간 금융회사들이다. 자산운용업계 고위 관계자는 “이미 국내 자본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은 절대적인데, 400조 퇴직연금까지 국민연금이 장악하면 민간사업자는 성장하는 시장에서 제대로 기회를 잡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