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몰아 보며 브라운관 앞에서 주책없이 눈물을 쏟았다. 아!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면, 슬픔과 비참을 겨루는 병원도 ‘쓸만한 천국’이 되는구나. 임의로 파헤쳐지는 육체의 정거장에서, 누군가에겐 청천벽력같을 뇌사 판정이 누군가에겐 가슴 벅찬 행운도 되는구나. 그래서 피투성이 가운데 살아남은 세 단어는 원망에 찬 고성이나 비명이 아니라,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로구나.
조정석, 유연석, 김대명, 정경호, 전미도… ‘99즈'라 불리는 이 빼어난 99학번 의대생 친구들의 찰떡같은 우정과 매력이 이 드라마의 엔진이지만, 기실 진짜 주인공은 병실과 대기실 복도에서 서성이던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이다.
간경화로 죽어가던 딸을 두고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는 도망치듯 행적을 감추지만, 몇 달 후 믿을 수 없이 감량된 몸으로 나타난다. 젊어서 돌보지 못한 딸한테 자기는 빼줄 게 간 밖에는 없노라고. 죽기 살기로 몸을 만들었다고. 늘 과민하게 의료진을 닦달하던 엄마는, 딸아이가 죽자 문책을 기다리며 고개를 떨군 의사에게 감사를 표현한다. 그동안 우리 모녀를 받아줘서 고마웠다고.
나는 이 드라마가 한없이 낙천적인 영화 ‘러브 액츄얼리' 같기도 하고, 끝없이 참회하는 영화 ‘매그놀리아' 같기도 했다. 인생은 예기치 않게 닥치는 불운의 연쇄작용, 인과의 징벌 같은데, 그럼에도 그 벼락 치듯 정신없는 생사의 틈바구니에서도 누군가는 값없이 심장과 간을 기증하고 의사들은 신실한 바느질로 인간의 육체에 ‘온기'를 심는다. 365일이 36.5도의 체온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얼마나 기막힌 우연인가.
일상에선 서로를 놀려먹는 5인방 의사들도 일에서만큼은 서로를 끔찍하게 존경했다. "나, 너 존경해." 대체 얼마나 헌신적이면 친구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걸까. 그들 각자 생명의 존엄 앞에 한없이 겸손했으며, 환자를 약자로 대상화시키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했다. 그들이 병실을 돌며 수시로 연주하는 존경과 존엄과 존중의 삼중주는, 비록 불운은 있어도 악인 없는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지 보여준다.
익준(조정석)은 5월 5일에 교통사고로 장기를 기증하는 한 남자의 적출 수술을 몇 분간만 미루자고 한다. 곧 자정이 되면 하루가 지나가니, 부디 매년 어린이날을 아빠의 기일로 맞는 슬픔만은 아이에게 덜어주자고. 간이식을 받고 살아난 한 남자의 농아 아들에겐 비둘기가 날아가듯 경쾌한 수화로 말한다. "아빠는 점점 더 괜찮아질 거야."
석형(김대명)은 태어나자마자 곧 죽을 운명인 아이의 울음소리에 산모가 슬퍼할까, 분만실이 떠나가도록 음악을 틀고, 외래 진료실 앞에서 짜증 내며 대기 중이던 임신부들은 방금 뱃속에서 아기를 잃은 임신부의 기나긴 통곡에 부른 배를 쓸어내리며 숨을 죽인다.
아무도 모른다. 왜 어떤 아이는 태어나 빛을 보고 왜 어떤 아이는 어둠 속에서 꺼져가는지. 왜 어떤 아이는 아빠를 잃고, 왜 어떤 아이의 아빠는 지켜지는지.
준완(정경호)은 딸의 결혼식 날 수술한 아버지를 대신해, 은갈치 색 양복을 갈아입고 환자 가족의 예식장을 찾지만, 정작 사랑하는 애인 익순이 떠날 땐 수술하느라 공항 배웅도 놓친다. 공감의 달인 송화(전미도)는 어느 새벽, 피곤에 젖은 친구와 누룽지를 먹다 애틋하게 묻는다. "익준아, 넌 널 위해 뭘 해주니?" 병실에서 피고 지는 어린아이의 숨에 맞춰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정원(유연석)은 가난한 이들의 병원비를 대주는 키다리 아저씨로 남는다.
무엇보다 생사를 가르는 결정의 중압감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다급한 호출에도 병원 사람들이 입맛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율제병원의 의사와 간호사가 보여주는 ‘먹방의 향연'에는 언제든 미련 없이 젓가락을 놓고 응급실로 내달려야 하는 자들의 순수한 탐식이 있다. 보기만해도 척추가 내려앉고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수술방을 나와서도, 송화와 준완, 익준과 석형, 정원은 씩씩하게 노래하고 사랑하고 먹는다.
배달된 삼겹살을 상추에 싸먹고, 칼국수를 끊지않고 ‘면치기’ 해먹고, 야간 수술 후 식은 라자니아를 데워 먹고, 컵라면에 나무젓가락을 꽂아 열반에 든 것 같은 표정으로 먹는다. 어쩌면 생사가 오가는 병원에서 그토록 먹는 장면이 많은 것은, 씹고 삼키고 식도를 타고 창자로 이동하는 유기물의 촉감과 온기가 그들에게 주는 생명의 감각 때문이리라. ‘카르페디엠'. ‘먹고 수술하고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의 순전한 몰입.
‘환자가 아프면 의사도 아프고 보호자가 슬프면 의료진도 애절하다’는 통증의 연대를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보여준다. 우리는 36.5도의 체온으로 연결돼 365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묵묵히 노숙자의 무릎에 슨 구더기를 걷어내던 장겨울 선생이, ‘당신이 죽으면 내가 짤린다’고 무릎 꿇고 환자를 설득해낸 도재학 선생이. 그들의 간절한 무릎이 너무 일찍 자기를 체념한 환자들을 일으킨다. ‘내가 대체 뭐라고, 저 사람은 날 포기하지 않는걸까.’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드라마의 주제가가 울려퍼지면, 코로나로 팔 걷어붙힌 의료진들이 떠오른다. 헌신적으로 일하는 가슴 따뜻한 의사들은 어디엔가 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