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4월 입주를 시작한 경기도 과천푸르지오써밋. 대우건설이 지은 이 아파트를 분양 받은 심모(가명·45)씨는 요즘 난데없이 변기의 구조와 설치 방법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변기에서 냄새가 올라오고 있어서다. 연구 끝에 애초부터 제품 자체가 잘못 선택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설치된 변기는 건식용 화장실에 적합한 것이었는데, 물 빠짐이 필요해 경사를 둔 화장실에 변기를 설치하려다가 냄새가 나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심씨는 다른 입주자들과 함께 이를 건설사에 따져 물었다. 건설사 관계자는 답을 할 권한이 없다면서 대답을 회피하다, 결국 본사에 이 상황을 알리고 답변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다른 입주자들은 심씨를 ‘변기열사’라고 치켜세웠다.
#2. 서울 서초구의 신반포 센트럴자이. 5월 말부터 입주 예정이지만 벌써부터 부엌 후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3단으로 틀어도 흡입력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이에 관심을 가진 이들끼리 모여 논문을 뒤져보며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이 아파트 입주예정자는 "사전점검 때 휴지 한장이 제대로 붙질 않아서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자가 아닙니다" 건설사의 모르쇠에 공부하는 입주자들
14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신축 아파트에 입주해 문제를 제기해도 건설사들은 ‘문제가 없다’는 답을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공능력 10위권에 드는 건설사들이 건축법상 문제가 되는 제품을 현장에 넣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정상 문제가 되지 않아도 제품과 설치상황이 맞지 않아 생기는 문제는 있다. 변기와 후드가 대표적이다. 이런 점은 입주자들이 연구해 따지지 않고서는 하자보수 논의 대상으로 올리기도 어렵다. 건설사 입장에선 이를 하자로 인정하면 전 세대 교체로 상황이 커지기 때문에 쉽사리 이를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앞선 사례에서 ‘변기열사’라는 변명이 붙은 심씨는 변기 물이 내려가는 각도와 물이 회전하는 횟수, 물이 내려갈 때 나는 소음에 따른 하자 판별 여부 등의 정보까지 수집했다. 심씨는 "건설사가 하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더 알아보게 됐다"면서 "오죽하면 내가 퇴근하고 이걸 들여다봤겠냐"고 했다.
이들의 정보원들은 인테리어 업자, 유튜브, 그리고 환경설비와 관련된 논문들이다. 새 아파트라도 인테리어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인테리어 업자들이 이를 지적해주는 경우가 많다. 서초구 반포동의 한 인테리어 업체 관계자는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보면, 배관·배수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나중에 인테리어업자 잘못이라는 덤터기를 쓰지 않으려고 그때 그때 집주인에게 현장을 보여주며 말하는 편"이라고 했다.
하자보수와 관련된 유튜브나 블로그 등도 입주자들이 주로 정보를 찾는 곳이다. 때론 학부 때 전공을 되살려 전공서적과 논문을 뒤적이기도 한다. 서울 서초구 신축 아파트의 경우 예비 입주자 중 공대 졸업자 서너명이 모여 후드 교체에 대비한 실험 계획을 세웠다. 새 아파트의 후드가 A4용지, 휴지, 실제 연기를 얼마나 흡입하는지 알아볼 계획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후드는 어떻게 기능하는 지에 대한 사례도 다른 입주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이 입주자는 "졸업하고 15년만에 공기역학, 공기저항 이런 단어를 내 인생에 들여놨다"면서 "휴지도 제대로 붙지 않는 후드가 정상이라고 하니, 이렇게 나설 수 밖에 없다. 학생 때 공부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고 했다.
입주자들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는 하자보수에 건설사들이 소극적으로 나서기 때문이다. 자재가 없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난리를 피우면 없던 자재가 갑자기 나타나 하자보수 처리 건이 완료된다. 입주자들은 신사적으로 나섰다간 하자보수를 본인이 다 떠맡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경기도의 한 신축아파트 입주자는 "건설사 관계자는 본사나 현장 직원이나 알아야 하는 내용도 ‘모르겠는데요?’라면서 시치미를 떼거나 무대응으로 임하고, 아니면 나를 ‘진상입주자’로 치부하면서 뭘 이런 걸 하자보수 하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나오곤 한다"면서 "하자보수 대상이라는 점까지 설득시키려니 공부하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1000명 모인 카톡방 증거에 건설사도 꼼짝 못해
"이건 하자가 아닙니다. 다른 집도 모두 이렇습니다. 확인해보셔도 좋아요."(하자보수 담당자)
"하자 맞습니다. 다른 집 상황은 이렇다고 합니다. 여기 사진 좀 보세요."(입주자)
서울 서초구의 한 신축 아파트에 투입된 현장 직원은 입주자들의 대응에 할 말을 잃었다. 공사가 커지면 하자보수를 하는 사람이나, 입주자나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 하자보수 대상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바로 하자가 맞다면서 다른 집 사진을 들이대니 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 신축 단지에서는 실시간으로 하자보수 내용과 처리상황이 공유되고 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이나 네이버·다음·밴드 등 커뮤니티에서 각 세대별 상황이 공유되다보니, 예전엔 하자보수 대상인지 몰랐던 입주자들도 하자보수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서울의 한 신축 아파트 입주자 김모(36)씨는 "벽이 휘었을 것이란 생각은 못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카카오톡에 공유한 것을 보고, 일일이 손으로 벽을 만져봤다"면서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 같다"고 했다.
모델하우스에서 찍은 사진도 카카오톡에 속속 공유된다. 입주자협의회가 시공이나 설계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하면 건설사는 통상 "모델하우스대로 시공했다"고 답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자료가 카카오톡에서 속속 모여지는 것이다.
서울 강북의 한 신축아파트 입주자는 "모델하우스대로 시공했다고 일단 답변하고, 막상 사진을 들이밀면 본사와 상의해보겠다, 아직 입장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등으로 차일피일 답을 미룬다"면서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모아보는 집단 행동이 없었다면 건설사 답변에 꼼짝없이 끌려갔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건설사들은 카카오톡으로 하자보수나 부실시공 사례가 부풀려진다고 항변한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누수가 일어났다고 하면 전체 1000세대 중에 1~2세대 뿐 인 경우가 많다. 잘못 시공될 확률이 극히 낮은데 이 내용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다보니 ‘잘못 지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건설사 관계자는 "사실보다 더 부풀려서 카카오톡 등에 얘기하는 입주자 탓에 불안감을 느낀 다른 입주자들이 하자가 아닌데도 하자보수를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현장 일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