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엘리트들은 노동하고 전쟁할 대중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의료나 복지에 투자할 필요가 없어진다. AI로 인해 잉여 계급이 생기겠지만 기본 소득이 그 해답이 되기까지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유발 하라리가 2년 전 내한했을 때 했던 말이다. 이 예언은 코로나 이후 오히려 반어법이 되어 현실을 강타했다. 의료 복지를 삭감하고 생산성 신화를 이끌었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연합과 미국은, 장례 절차조차 사치일 만큼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부고를 치르고 있다. 미래의 숙제이자 급진적 실험이라고 했던 기본 소득은 재난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복지로 실행되고 있다.
‘멸종할 것인가 영생을 누릴 것인가'. AI에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하라리의 도전적이고 비관적인 가설은 꽤 학습효과가 있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신기술이 인간의 직업을 빼앗고 생명 창조와 파괴의 능력으로 인간은 신이 될 것'이라는 진화의 언어는 당분간 아주 먼 미래로 보내도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멸종과 영생’ 사이에 있지 않았다. 동물과 환경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을 뿐. 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그 ‘사이’를 누비는 절대 강자는 바이러스며, 생태계가 존재하는 한 영생은 오로지 바이러스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저소득국가의 빈곤 구제와 공중 보건을 위해 현실적인 활동을 했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빌 게이츠는 2015년에 4월 TED 강연에서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 "앞으로 몇십 년간 만약 무언가 1천 만 명 넘는 사람들을 죽인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매우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일 것입니다. 인류는 핵 억제는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전염병을 멈출 시스템에는 매우 적게 투자했습니다."
‘상상의 언어’로 빅히스토리를 설계하는 유발 하라리에 비해, 빌 게이츠는 지극히 치밀한 ‘사실충실성의 언어'로 근미래를 이야기한다. 그가 2018년 "데이터를 보라.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한 스웨덴의 공중 보건의사이자 통계학자인 한스 로슬링의 책 ‘팩트풀니스'를 미국 전 대학의 대학생들에게 선물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옌스 바이드너는 불안이 가중될수록 "근거없는 비관주의로 심리적 비용을 치르지 말라"며 ‘데이터에 근거한 지적인 낙관주의의 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해왔다. 비관주의자의 언어가 ‘불행을 과장하고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세상의 종말이 올 것처럼 떠드는 호들갑’이라면, 지적인 낙관주의자의 언어는 ‘변화를 일으키고 책임을 지고 상황을 개선하는 구체적이고 묵묵한 행동 언어'다.
뉴욕주지사 쿠오모의 언어는 뉴욕이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서도 그 도시의 자존감을 지켜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한 정확한 일일 숫자 공개, 기간별 추이 등을 보여주는 과학적 예측, "오로지 팩트만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된다"는 그의 친절한 일일 브리핑에 많은 사람이 기운을 얻었다.
가짜 뉴스와는 달리 팩트에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비극이 현실로 닥쳐와도 그것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잠재력으로 기능할 거라고 상상하며, 공포에 손 놓지 않고 가정과 일터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한다.
어쩌면 인간이 고통을 견디는 힘은 불안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나 자신을 설명해줄 ‘더 나은 언어’를 갖는 것이다. 나를 설명하고 내가 공감하는 언어가, 혼돈을 이기는 존재의 최후 방역선이 된다.
지난달 인터뷰했던 최전선의 사회역학자,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는 혐오의 폭탄이 터지는 코로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라는 현명한 과학의 언어를 건져 올렸다. ‘자가 격리'로 곤경에 처한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회적 거리 좁히기'라는 약자의 언어를 발굴해냈다. 외신을 통해 18kg의 배낭을 앞뒤로 둘러메고 8km를 걸어 78명의 제자들에게 점심을 배달하는 영국 빈민가 교사의 모습에서 ‘사회적 거리 좁히기'라는 ‘더 나은 행동 언어’를 본다.
영국 초등학교의 젠 포울스 선생님이 굶고 있는 제자들에게 점심을 배달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립의 시간은 미래의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언어'를 찾아내는 시간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우리가 확연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우리는 ‘호모 데우스(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가 아니라 ‘호모 심비우스(공생하는 인간)’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인류의 불멸이나 바이러스의 박멸이 아니라 더 나은 면역력과 백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몇 개월간 깨달은 몸의 언어도, 영생일줄 알았던 시간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진 ‘회생’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