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질문을 위임받은 자라 한다. 내가 질문하는 인간이 된 건 소심한 성정 때문이다. 묻는 것은 직업이기 전에, 낯선 세계를 견디는 태도였다. 묻고 듣는 동안은, 들인 노력에 비해 과하게 존재감이 유지되고 정보가 입력되며 관계가 호전됐다. 그래서 계속 물었다. 때로는 궁금해서 때로는 불안해서. 지하철 역사 안에서 행인을 붙잡고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를 묻고, ‘총균쇠’를 쓴 재러드 다이아몬드 선생 앞에서 ‘세균의 정체’를 묻고.
인터뷰는 질문과 답이 어우러진 대화의 향연이다. ‘질문이 좋다'는 말을 들을 때가 간혹 있다. 질문의 내용이 기발해서라기보다 확장된 상태로 대상을 유도하는 미묘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때때로 어떤 물음표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본질에 가까워 모두에게 향할 때가 있지 않던가. 취재 현장에서 느끼는 건 갈수록 ‘질문의 독창성’은 덜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질문자의 진정성 있는 태도, 충분한 시간만이 답변자의 뇌를 이완시키고, 자기가 해야 할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돕는다(‘불의를 감추고 캐내는’ 특수 관계의 문답은 예외다).
질문이란 무엇인가? 질문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타인은 무엇인가' ‘바이러스는 무엇인가?’ ‘정부는 무엇인가?’ ‘마스크란 무엇인가?’... 정체성의 위기 혹은 위기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안간힘부터 ‘언제쯤 끝날까?’ ‘어디가 안전할까?’ ‘점심은 또 뭘 먹나?’같은 절실하고 애틋한 질문까지.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회피하고, 가까스로 몇 개의 사소한 질문에 답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살아간다.
문득 몇 년 전엔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던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칼럼이 생각난다. 그는 명절에 심심풀이로 개인사를 파고드는 무례한 친척들에게 ‘후손이란 무엇인가'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웬 소크라테스 산파술의 현대적 변형인가 싶으면서도, 나는 한편으론 깜짝 놀랐다. ‘저건 내 인터뷰 방식과 매우 유사하군! 현안을 위장해서 스리슬쩍 근본적인 물음표를 서브하듯 던지는 모양새가!’
뭔가 우리가 깊은 결속 관계에 빠져있다는 착각이 들수록, 평범한 질문은 ‘맥락’ 속에 한층 더 드라마틱해진다. 어쩌면 인터뷰의 신비는 질문을 던지고 받는 미묘한 행위 그 자체에 있다. 상대의 컨디션에 맞춰, 묻는 순서를 재배치하는 게 이 기술의 전부다.
오랫동안 인터뷰어로서 살아오면서 작게나마 깨달은 게 있다. 질문하는 한, 모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만난 유아인과 옥주현이 특별히 그랬다. 그들은 질문을 선물처럼 반겼다. 알고 보니 평소에 자신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진실한가? 나는 양심적인가?’를 질문하다 자가 주택을 공공 예술 프로젝트에 기꺼이 던진 유아인과 ‘무엇을 하면 즐거운가? 어떻게 하면 잘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또 묻다가 음성학의 우주를 발견했다는 옥주현. 그렇게 자문자답으로 갈고닦은 그들의 커리어는, 자아의 빛으로 선명하고 튼튼했다.
영리한 예술가는 자신에게 했던 질문을 당대의 대중에게 던진다. 봉준호가 그렇다. 그는 영화 ‘기생충'으로 엄청난 크기의 물음표를 쏟아냈다. ‘계급은 무엇인가' ‘가족은 무엇인가' ‘냄새는 무엇인가' ‘예의는 무엇인가'. 아름답고 웃기고 슬픈 톤앤매너로 던진 이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 세계 관객의 머릿속을 맹렬하게 헤집고 다녔다. 아카데미 시즌에 그가 600여 개 매체의 인터뷰를 한 것도 자신이 뿌린 질문의 씨앗을 거두어야 했기 때문이리라.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하는 존재다’라고 말한 사람은 괴테다. 우리가 방황하는 것은 우리가 묻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문을 잊고 인터넷을 헤매다니면, 유튜브에서 개 고양이 동영상만 보게 될 거라고 유발 하라리도 경고했다. 질문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간다. 묻고 답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고귀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질문에 존재의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