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사이 ‘개근 거지’라는 뉴스가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쯧쯧. 해외 여행을 못 갔으니, 결석 한 번 못 해보지!’ 개근하면 성실의 인장이 아닌 가난의 낙인이 찍힌다는 이야기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꽃이 피나 개근했던 나는, 기가 막혔다. 수학여행조차 담임 선생님 쌈짓돈으로 갔던 나는 그럼 ‘원조 OO’였던가. 그날 저녁, 우리 집 초등생 딸아이에게 그 말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들어봐. 우린, 그런 말 안 해.”
그러면 그렇지. 보통 아이들은 어른들이 피곤하다고 느낄 정도로, 차별이나 폭력에 민감하다. ‘뚱뚱하다'는 표현조차 서로 외모 비하로 교정해줄 만큼 ‘문명화'된 세대가 요즘 아이들이다. 추론컨대 온라인 카페에서 오가던 학부모들의 자조 섞인 농담 몇 개가 ‘카더라' 통신의 확성기를 달고 세상에 나왔을 터.
기실 ‘휴거'도 ‘빌거'도 ‘엘사'도 부동산 계급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이 제 불안을 처리 못 해 ‘놀이터에 빙의한 후', 동네방네 "애들이 그러던데" 도둑이 제 발 저려 호들갑을 떨어댄 것은 아닐지. 놀리고는 싶고, 놀림받긴 싫은 미숙한 어른들이 선수 쳐서, 아이들에게 혐오의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의 계급투쟁'이라는 책이 있다. 일본인인 브래디 미카코가 영국 최악의 빈곤 지역 무료 어린이집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가난이 어떻게 아이들의 일상을 침식하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무엇보다 백인 빈곤층, 동양인 보육사, 이민자 가정, 리버럴한 인텔리 히피들이 모두 같은 장소에서 어떻게든 함께 살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서로 다른 신앙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불필요할 정도로 증오하지도 않았다. 수시로 부딪히고 해결하는 것이 곧 삶이고 교육이었다.
윗동네 중산층처럼 때론 열성 이민자 엄마들은 더 가난한 백인들을 배제하려는 ‘소셜 클렌징'의 욕망을 보였지만, 아이들은 구별 짓기에 태평했다. 예컨대 백인 싱글맘의 문제 아동이 빙글빙글 돌며 큰대자로 드러누우면, 모래밭에서 따로 놀던 아프리카계 아이와 폴란드 아이가 달려가 똑같이 큰대자를 그리며 땅바닥에 드러누워 외쳤다.
"이제, 좋다!" "그래, 좋네." "좋아! 좋아!" 초가을 오후, 지상으로 내려온 밝은 별들은 한껏 기분이 좋아 파닥거렸다,고 브래디 미카코는 다감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복지 긴축 시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영국 곳곳의 무료 어린이집은 푸드뱅크로 바뀌었고, 지금 영국의 빈민가 아이들은 교육 과정에서 위쪽 계급 아이들과 옷깃을 스칠 인연조차 맺지 못한다고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증언하고 있다.
계급은 점점 분리되고, 아이들은 이미 평행 우주를 살아간다고. 그래서일까. 서구에서 봉준호의 ‘기생충'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도 빈곤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애완하기 좋은 상태로 전시해서’라는 말이 있다. ‘기생충'은 칸의 영광을 넘어 아카데미로 향하고 있다.
69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복지 후퇴 후 빈곤의 실상을 정면으로 다뤘다. 지원금이 끊겨 푸드뱅크에서 허겁지겁 통조림을 뜯어 먹다 부끄러워 울먹이는 이십 대 싱글맘 케이티 옆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말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부모 찬스에 이어 사회 찬스도 빼앗긴 ‘세습 빈곤층 사회'의 아이들을 챙기는 이는, 역시나 실직자인 이웃 노인 다니엘이다. 영화는 인간의 존엄성과 연대의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간다.
혐오에 무력해진 사람을 일으키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존엄을 되돌려주는 일이다.
나는 그 일을 이탈리아 신부 김하종에게 배웠다. 지난 겨울 만났던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는 시든 이파리처럼 숨죽인 거리의 노숙인들에게 30년간 밥을 먹였다. 노숙인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후, 그는 일일이 눈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 너보다 괜찮아서 밥 주는 거 아니다. 나, 너 존중한다. 너하고 나, 같은 인간이다.’
그 거리의 밥을 먹으며 18년간 노숙하다,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이란 책을 쓴 임상철 작가의 임대 주택을 방문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전기밥통과 사료통이 나란히 놓인 단칸방에서 고양이와 동거하던 그는, 품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꺼내 나를 환대했다. 노숙자 자활 잡지를 팔 때부터, 어린 시절 머물렀던 보육원이 생각나 책 두 권 값을 고아원에 기부했다던 그다. 그렇게라도 사회에 염치를 지키고 싶었노라고. 방 한쪽엔 백인 중심의 문명사에 경종을 울린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균쇠'가 꽂혀 있었다.
진정한 자존감은 선악을 분별하는 지성과 도덕 정신에서 나온다. 처음엔 설사 ‘척이라도' 차별과 배제 대신 공감과 존중의 언행을 반복하다 보면 서서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쌓인다고, 백종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거지’란 말 함부로 쓰지 마라. 걸핏하면 ‘거지’를 붙여서 혐오와 자조를 증폭하는 이는, 한 사회의 자존의 면역을 떨어뜨리는 바이러스다. 이젠 지구촌이 한 몸, 순식간에 서로를 검증하고 방역하는 초연결 시대다. ‘팩트풀니스’의 저자이자 데이터과학자인 안나 로슬링에게 들었던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혐오 뉴스에 속지 않고, 악성 댓글도 함부로 달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데이터는 우리의 언행을 낱낱이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