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창간 10주년 기획]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재개발·재건축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인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되, 지속가능한 미래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종의 재창조 과정이다. 지구촌 곳곳의 거대 도시들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이 숙제를 해왔다. 이제 한국도 이 물결 앞에 마주 섰다. 2020년 창간 10주년을 맞는 조선비즈가 이른바 도시재생의 모범생들을 직접 살펴봤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참고하면, 쇠락한 도시에 더 활기찬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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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chosun.com/interactive/urban/index.html?selector=smart&index=1
석탄발전소 대신 지열 사용하는 헬싱키
아이디어 실현하면 그게 스마트시티
쓰레기 버리면 중량 달아 비용 청구
"똑똑한 정보 제공하면 시민 삶 나아져"
‘똑똑한 도시’란 무엇일까. 초고층 빌딩이나 초고속 통신망 같은 물리적인 요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연광을 끌어들여 지하에 식물을 키워낸 공원, 땅에 묻힌 진공관으로 쓰레기를 자동수거하는 시스템, 전기로 운행하는 무인버스처럼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그것을 기술로 구현한 곳이 바로 스마트시티(Smart City)다.
‘북유럽 디자인’과 ‘핀란드식 교육’처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그들만의 문화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핀란드도 스마트시티를 만들고 있다. 역시 그들만의 방식으로다. 수도 헬싱키를 찾아 이들의 실험을 들여다봤다.
지난 10월 22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체감온도가 0도 가까이로 떨어진 아침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칼라사타마역으로 향했다. 6분 만에 닿은 칼라사타마역에서 걸어나가자 공사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석탄을 사용하는 하나사리(Hanasaari) 화력발전소를 철거하는 작업이다. 헬싱키시는 오는 2035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뒤 칼라사타마의 발전소를 폐쇄했다.
헬싱키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재생에너지와 설비를 다양하게 도입하고 있다. 지열을 이용해 데운 물을 난방에 활용하고, 지하동굴에 고인 찬물을 냉방에 사용하는 식이다. 석탄이나 석유를 사용한 전력 생산방식보다 탄소배출량이 80%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시 당국은 기대하고 있다.
언뜻 보면 흔한 친환경 정책이지만, 헬싱키에서는 이를 스마트시티를 만드는 과정 중 하나로 본다. 칼라사타마는 스마트시티로 변신하려는 헬싱키의 ‘실험실’이다. 헬싱키 시 당국은 이곳에서 ‘아이디어’를 ‘기술’로 구현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사업은 헬싱키시가 설립한 ‘포럼 비리엄 헬싱키(Forum Virium Helsinki)’가 맡아 진행하고 있다.
오렌지색 간판이 인상적인 한 건물(REDI)을 지나자 건물 앞에 낯익은 모양의 쓰레기 수거통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의 세종특별자치시에서도 본듯한 쓰레기 수거함이다. 지하에 묻힌 관을 통해 집하장으로 운반되는 것은 같지만, 훨씬 똑똑하다. 알아서 무게를 재고 버린 사람에게 청구하는 기능이 있다.
쓰레기를 버리고 싶으면 투입구 위쪽에 인식카드를 댄 다음 쓰레기를 넣는다. 사람을 인식한 시스템은 무게에 따라 처리비용을 청구한다. 비용은 사람이 쓰레기차를 이용해 일일이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는 전통적인 방식보다 15% 정도 비싸다.
생활편의시설이나 SOC 분야의 새로운 기술을 검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시범운행 중인 무인전기버스도 그 중 하나다. 무인버스를 실제 거리에서 운행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다양한 장애물이 있는 도로를 주행할 때 전기자의 전력이 얼마나 소모되는지 등과 관련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
포럼 비리엄 헬싱키의 케르코 반하넨(Vanhanen) 스마트 칼라사타마 프로그램총괄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다면 실험실이나 학교가 아닌, 실생활과 길거리에서 시험해보고 사람들에게서 피드백을 받는다"면서 "칼라사타마 곳곳이 스타트업을 위한 테스트베드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헬싱키 도심의 동쪽에 자리한 항구인 칼라사타마는 20세기만 해도 제조업 단지였다. 주거시설이라고는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사는 소형주택 뿐이었고, 2010년까지만 해도 공원이나 문화시설은 커녕 변변한 상업시설도 없었다.
칼라사타마의 변신은 헬싱키시 의회가 이곳의 빈 공간에 ‘스마트시티’를 만들겠다고 결정한 2013년 시작됐다. 의회는 오는 2040년까지 6억유로(한화 약 1조500억원)를 투자하고 민간 기업으로부터 50억유로를 유치해, 친환경 공유 경제 도시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헬싱키시는 이곳을 주거와 일자리, 여가생활, 편의서비스가 어우러진 신도시로 조성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스마트시티를 조성해 칼라사타마의 주민 수를 2만5000명 늘리고, 일자리를 1만개 창출하는 게 목표다.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수도인 헬싱키의 인구가 65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만만한 숫자는 아니다. 스마트 칼라사타마는 제조업의 시대를 졸업한 핀란드가 새로운 미래의 도시상을 설정하는 사업이라는 의미가 있다.
반하넨 총괄은 "북유럽에서 정의하는 스마트시티는 ‘최신 기술을 장착한 도시’가 아니다"라며 "시민들이 똑똑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끔 충분한 지식과 기회가 주어지는 도시가 바로 스마트 시티"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해 지속가능한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스마트시티의 요건 중 하나" 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헬싱키는 스마트그리드·사물인터넷(IoT) 같은 첨단기술을 사회간접자본(SOC)과 기반시설에 접목하는 일 만큼이나 녹색기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칼라사타마에 건물을 짓는 기업은 설계 단계부터 시 당국이 제시한 전력사용량 기준을 맞춰야 한다.
칼라사타마의 모든 아파트 건물의 전기 설비는 주민들에게 전력 사용 현황을 실시간으로 제공하게 돼 있다. 냉방, 난방, 조명, 주방기기 등 12개 세부항목으로 나뉘어 표시돼, 주민들이 집안의 어떤 기구나 설비에서 전력을 얼만큼 사용하는지 항상 확인할 수 있다.
사용량이 많은 시간대에 사용한 전력에는 더 비싼 요금을 매긴다. 요금이 비싼 시간대를 피해서 세탁기나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고, 쓰지 않는 전등은 끄는 식으로 주민들의 행동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반하넨 총괄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면 똑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헬싱키시와 스마트 칼라사타마의 비전은 ‘하루에 한 시간 더’, 즉 시간 관리"라고 강조했다. 스마트시티와 다양한 시스템, 기술을 통해 하루에 몇 분씩 시간을 아끼고, 그 시간들이 모이면 주민들의 삶은 더 쉬워지고 편해진다는 것. 반하넨 총괄은 "스마트시티란 결국 똑똑한 기술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인 도시"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할 환경을 만들다 보니 헬싱키는 어느덧 벤처 창업의 메카가 됐다. 글로벌 스타트업 분석기관인 스타트업지놈은 ‘2019년 세계 스타트업 생태계 보고서’에서 세계화 초기 단계에 돌입한 5대 스타트업 도시로 헬싱키와 이스라엘 예루살렘, 덴마크 코펜하겐, 캐나다 몬트리올, 호주 멜버른 등을 꼽았다. 스타트업들의 세계화 수준이 높고,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용이한 환경이라는 평가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