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빌레나무가 떴습니다. 실내의 미세먼지를 20%나 저감시켜 주는 나무라는 기사가 얼마 전에 광고처럼 퍼져나간 게 이유였습니다. 공기청정기가 가정필수품이 되어가는 시대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미세먼지가 확 사라졌다면서 대단한 효과라도 있는 양하는 과장 기사도 있고, 빌레나무가 고유종이라고 하는 잘못된 정보도 있습니다.
빌레나무는 제주도에서 발견되어 2006년에 미기록종으로 보고된 나무입니다. ‘빌레’는 넓고 평평한 돌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으로, 빌레처럼 노출된 암반이 많고 토심이 얕은 지역에서 빌레나무가 자라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습니다.
어떤 박사님의 도감에는 ‘천량금’이라는 이름으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건 백량금과 비교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빌레나무는 제주도 서부 지역의 곶자왈 지대에서 드물게 자랍니다. 우리나라 외에 중국 남부와 일본 남부, 그리고 동남아 지역에서도 자라므로 고유종은 아닙니다.
꽃이 커야 나무가 눈에 잘 띌 텐데 자잘한 종 모양의 꽃이 여러 개가 달리는 탓에 피어 있어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잎은 좀 크고 길쭉한 편입니다. 잎이 크다는 것은 공기와 관련된 기능에 효과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합니다.
함께 실험 대상이 됐던 백량금이나 자금우 같은 유사종에 비해 빌레나무의 잎이 큰 편이니 그들에 비해 오염 물질 저감 효과가 뛰어난 건 예측 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백량금, 자금우, 산호수 같은 것은 우리가 이미 실내식물로 기르고 있어 많이 알려진 편입니다.
꼭 빌레나무가 아니더라도 실내에서 식물을 기른다면 공기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입니다. 실외에서는 숲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미세먼지로 가득해 대기의 질이 좋지 않은 날에도 숲은 차단효과나 필터효과가 있어서 그 속에 있으면 비교적 미세먼지의 영향을 덜 받기 마련입니다.
사실 빌레나무의 실내 미세먼지 저감 효과가 20%라는 수치는 그리 큰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있고 없고의 차이에 의한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빌레나무가 보급된 곳과 보급되지 않은 곳의 차이가 그 정도라면 다른 잎이 큰 나무로도 그에 준하는 정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백량금이나 자금우 같은 유사종에 비해 빌레나무가 어느 정도나 더 탁월한지를 나타내주는 수치가 의미 있을 겁니다.
어쨌든 안 그래도 귀한 나무가 미세먼지 저감 효과가 알려지면서 채취의 표적이 되면 어쩌나 싶습니다. 현재 한라수목원을 비롯한 몇몇 곳에서 대량으로 증식해서 보급하고 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므로 빌레나무를 이용한 미세먼지 문제 해결한다면 국내의 식물자원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좋고 여러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빌레나무는 남방계 식물이라 실외에서 기르기는 어렵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자라는 식물 중 좀 더 이용했으면 하는 것은 왕벚나무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왕벚나무는 이미 일본의 것과 유전자적으로 같은 나무가 아니라는 판정이 났습니다. 일본의 것은 1700년대 도쿄 근처에서 자생종인 올벚나무와 오오시마벚나무를 인위적으로 교배해 만든 품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왕벚나무와 다르게 표기하기 위해 일본의 것을 ‘소메이요시노벚나무’로 부르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건 너무 기니까 그냥 일본왕벚나무로 부르자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왕벚나무라는 이름을 일본에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왕’자를 빼고 일본벚나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겁니다.
어쨌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여러 도시나 공원에 대단위로 심어놓고 축제를 여는 나무의 대부분은 제주도의 왕벚나무가 아니라 일본의 것이라고 합니다. 분홍색 진달래와 노란색 개나리로 대변되는 우리의 의식 속에 하얀색 벚꽃이 들어와 축제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제주도의 왕벚나무는 올벚나무를 모계(母系)로 하고 벚나무 또는 산벚나무를 부계(父系)로 해서 태어난 자연잡종으로 봅니다. 자연교잡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지만 돌연변이와 함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현상입니다.
벚나무는 자기 꽃가루가 자기 암술로 떨어져 수정되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가 있는데, 유연관계가 있는 근연종에게는 허용하는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즉, 근친교배는 막으면서 종간 교배에는 융통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에 적응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정말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어쨌든 제주도의 왕벚나무는 약 200개체 정도 발견되었는데, 제주 왕벚나무의 4/5은 이런 1세대 잡종이고, 나머지는 왕벚나무가 부모 종인 올벚나무나 벚나무와 다시 잡종을 이루는 역교배 잡종으로 잡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주도의 천연기념물 왕벚나무를 살펴보면 조금씩 다른 점이 관찰됩니다. 천연기념물 제159호인 ‘제주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의 왕벚나무는 좁은 종 모양의 꽃받침통을 가진 꽃이 핍니다. 그런 것이 일반적인 왕벚나무 꽃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천연기념물 제156호인 ‘제주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의 왕벚나무는 꽃받침통이 항아리 형태의 꽃받침통을 가진 꽃이 피는 것이 왕벚나무보다 올벚나무에 가깝습니다. 왕벚나무의 변이의 폭이 의외로 넓다 보니 이런 불완전성에 대해 문제를 삼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주도의 나무 중 잘 알려졌으면 하는 것은 목련입니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야 제주도의 확실한 자생지에서의 목련을 처음 보았습니다. 백목련과 달리 목련은 꽃 아래에 작은 잎이 1~2개 정도 달립니다.
자생종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그 종에 대해서만큼은 얼마든지 개발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중국 원산의 백목련을 잔뜩 심어 봄을 즐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련을 개발해 심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앞서 빌레나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자원화할 수 있는 나무가 많습니다. 특히 제주도에는 아직도 많은 식물들이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기다립니다.
희귀종이더라도 쓰임새를 발견하고 대량 증식 기술을 개발해 보급한다면 더 이상 미스킴라일락(≠털개회나무)이나 코리안퍼(≠구상나무)의 사례를 들먹이며 빼앗긴 식물주권 운운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잠깐 빼앗겼던 들이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에 우리의 꽃과 나무를 즐겼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