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출신으로 유럽을 두루 여행한 최초의 인물은 누구였을까? 구한말 인사인 민영익, 서광범, 변수이었다. 이들은 고종이 최초로 미국 사절단으로 1883년에 보낸 ‘보빙사’의 11명 중 일원으로 귀국길에 유럽에 들려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두 눈으로 직접 관찰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렇다면 누가 유럽에 관한 인상을 대중들에게 처음 남겼을까?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이다. 유길준은 민영익이 이끌던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미국측 인사의 권유와 민영익의 허가로 미국유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길준은 유학도중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는데, 귀국길 배편으로 유럽의 주요 지역을 방문하게 된다. 1885년 2월 유길준은 베를린을 방문한 뒤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황궁 문 앞에는 유명한 후례두익(厚禮斗翌) 선왕의 말 탄 동상을 세워놓고 있는데 그의 남다른 위풍과 맹렬한 기상은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후례두익'은 누구일까? 프리드리히 대왕, 베를린의 세종로라 할 수 있는 운터덴린덴, 훔볼트 대학 앞에 우뚝 선 기마상의 주인공이다. 유럽의 변방에 불과하던 베를린이 유럽, 더 나아가 세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도록 이끈 프로이센의 세 번 째 왕이다. 정식 이름은 프리드리히 2세다.
1740년 5월 31일,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으로 대관식을 하던 날 행사를 간소화했다. 할아버지였던 프로이센의 초대 왕 프리드리히 1세는 즉위식 때 1,800대의 마차와 3만여 필의 말을 동행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아무런 에스코트도 받지 않았다. 젊은 군주는 요즘 말로 쿨(cool)한 군주, 멋진 왕이 되길 원했다. 그는 유명한 계몽 군주답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 나라의 무지, 편견과 싸운다. 백성을 계몽시키고 품행과 도덕을 교화시키고 그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왕으로서 그가 취한 첫 번째 조치는 가난한 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책이었다. 혹독한 겨울 동안 가격이 치솟아 백성들이 곤란을 받자 왕실 곡물창고를 활짝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싸게 판매토록 했다.
주요 생활품목에 대해서는 간접세를 폐지토록 했다. 그가 취한 두 번째 조치는 민간인에 대한 고문 폐지였다. 고문제도를 철폐한 것은 유럽의 군주 가운데 그가 처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였다. 아버지에게 군인의 삶은 최고의 가치였다. 군대는 그에게 최고의 학교였다. 프로이센을 가리켜 병영국가, 독일 사람을 가리켜 독일병정이라고 하는 다소 경멸적인 수식어와 이미지가 생긴 것은 바로 이때 생겼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과 가치관, 인생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같은 것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로 달랐다. 두 사람의 극도로 원만치 못한 부자 관계는 독일역사에서 유명하다.
아들 프리드리히는 어릴 때부터 총이나 칼보다는 플루트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길 좋아했고 철학과 문학을 즐겼다. 아버지의 눈에 그런 아들이 유약해 보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의 자질로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는 군인왕이라 불리면서도 평생 단 한 번도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이 죽었던 반면, 아들은 군인과 전쟁을 싫어했지만 왕이 된 이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아버지는 툭하면 아들에게 매질을 했다. 추운 날씨에 손에 장갑을 낀다는 이유로, 숲 속에서 플롯을 연주하다 들켰다는 이유로, 매질을 하였다. 결국 아들 프리드리히는 절친한 친구 카테와 함께 아버지에게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금방 발각된다. 왕세자는 감금당하고 친구의 사형장면을 눈앞에서 보도록 엄명이 떨어졌다. 사형보다 더 끔직한 형벌이었다.
그토록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프로이센 군대를 조련하고 군비를 집중하였던 군인왕이 아니었다면 부국강병 프로이센은 탄생할 수 없었다.
당시 프로이센의 인구는 224만 명이었지만, 8만 명의 군인을 보유해 유럽에서 4번째로 많았다. 관료제와 상비군 제도는 프로이센을 강하게 만든 2대 요소로 이 제도를 정착시킨 이가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이를 이어받은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막강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슐리지엔 지방을 획득하였다. 이어서 프랑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손을 맞잡고 합동으로 프로이센 영토로 협공하여 들어온 7년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유럽의 열강들은 신흥국가 프로이센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전은 간단했다. 한마디로 ‘버릴 것은 버리고 얻어야할 것은 반드시 얻자’는 것. 프로이센보다 몇 배나 우월한 수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서 그는 포기해야 할 부분은 연연해하지 않고 과감히 버리는 작전을 구사했다. 전략 포인트에 병력과 화력, 지략을 집중시키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었다.
포츠담은 베를린에 이웃한 도시다. 그곳은 한국의 운명과도 관련 있는 포츠담 회담장으로 알려진 체칠리엔 호프와 함께 또 하나의 볼 거리가 있다. 바로 상수시 궁전이다.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산수지’(山秀支)라 표기한 그곳이다.
상수시(Sans Souci)란 불어로 ‘근심 없다’는 뜻이다. 불어를 모국어처럼 쓰던 대왕은 궁의 이름을 작명하였고 스스로 건물 기본 스케치까지 하였다. 인생 후반기 국정과 전쟁에서 벗어나 문학과 예술, 철학에 몰두하고 싶었던 것이다.
포츠담의 여름별궁 상수시 궁전에서는 유명 음악가가 자주 초대되어 콘서트가 거행되고 철학 담론도 벌어졌다. 그 대표적 손님이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볼테르였다.
멀리 포츠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상수시 거실 의자에서 그는 74세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을 했지만 평생 한 번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 사생활은 언제나 고독하였다. 죽기 전 그가 남긴 유언은 간단했다.
"나는 철학자로서 인생을 살았으니 그렇게 죽고 싶다. 절대로 화려한 의식이나 치장을 하지 말 것이며 나를 따르는 행렬 없이 조촐히 상수시 궁 테라스 옆에 잠들고 싶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11마리가 죽거든 내 옆에 묻어 달라!"
그 11마리는 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달마티안 개들을 말한다. 그의 무덤 옆에 크기가 조금 작은 11개의 돌덩어리들이 있으니 바로 반려견들의 무덤이다.
그의 무덤에는 언제나 몇 알의 감자가 놓여있다. 그것은 독일에 감자를 보급한 장본인이 바로 대왕이기 때문이다. 감자는 지금 독일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지만 그의 재임시절만 하여도 많은 유럽인들은 감자 먹기를 꺼려했다. 흉한 감자의 외형 때문에 먹으면 독이 퍼져 죽는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백성들의 그런 무지를 깨기 위해 국민들 앞에서 몸소 감자 시식회를 열곤 했다. 그 결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은 흉년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베를린과 독일의 리더십의 연원을 알고 싶다면 상수시 궁전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으로 가보면 된다. 바로 여기에서 독일의 파워가 생기기 시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