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서울 청담동의 한 가구 전문점에서 만난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Rashid·57)는 키 190cm를 웃도는 장신이었다. 상·하의와 운동화까지 모두 흰색으로 통일한 그는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에 그어진 두 선은 마치 형광펜으로 그린 것처럼 선명한 핑크색이었다. 긴 손가락엔 큼지막한 반지 2개가 보였고, 깔끔하게 정돈된 손톱은 흰색과 연두색이었다. 팔에 찬 스마트워치도 흰색이었다.
카림 라시드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제품은 9달러짜리 휴지통이다. 1930년대 할리우드 배우 그레타 가르보(Garbo)의 이름을 딴 '가르보' 휴지통은 1996년 출시 후 700만개 이상 팔렸다. 둥근 입구가 바닥보다 넓은 모래시계 모양 가르보 휴지통은 디자인 가치를 인정받아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영구 소장품이 됐다. 카림 라시드는 휴지통이나 물병처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소비재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그는 "디자인의 근본 목적은 우리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며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 미술관에 전시되기보다 시중에 널리 유통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기온이 30도를 웃돌았지만, 그는 야외 테라스에서 인터뷰 하자며 자리를 잡았다.
—별명이 '플라스틱의 왕자'다. 플라스틱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플라스틱으로는 이전에 없었던 형태를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플라스틱은 민주적이다.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디자인을 입힐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의 가격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민주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고가(高價) 제품을 취급하는 시장은 사라지거나 도전받고 있다. 패션 산업만 봐도 이런 흐름이 뚜렷하다. 럭셔리 의류 시장의 성장세는 주춤하거나 꺾이는 중이다. 부자는 항상 있기 때문에 고가 시장은 존재하겠지만, 규모는 점점 작아질 것이다. 오늘날의 대중 시장은 자라(Zara)와 유니클로(Uniqlo), 이케아(Ikea) 같은 브랜드가 잡고 있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세상이다."
—평소 디자인할 때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가.
"실용성이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는 내가 프랑스 가구업체 마이오리(Maiori)와 협력해 만든 야외용 의자다. 야외용 의자·테이블은 운반과 보관이 편해야 하기 때문에 알루미늄 소재로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알루미늄은 비를 맞아도 햇빛이 강해도 잘 부식되지 않는다. 테이블은 잘 접히고 쉽게 들어 올려 여러 개를 포개놓을 수 있게 디자인했다. 나는 첫 단계부터 제품이 나오는 마지막 단계까지 한 번에 생각한다.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는 아이디어를 스케치북에 그릴 때부터 소재, 생산 방법, 유통, 제품을 사용할 소비자가 느낄 감정 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그린다."
이집트 출신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시드는 프랑스의 필립 스탁, 네덜란드의 마르설 반더르스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산업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디자인 영역은 휴지통부터 가구, 호텔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3M·아우디·소니에릭슨·삼성 등의 3000여 제품을 디자인했고 국제 디자인상을 300여 차례 받았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은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편의점 가면 보이는 음료 '비타민워터'와 애경의 주방세제 '순샘버블' 용기, 긴 꽃병 형태의 겐조(Kenzo) 향수병 등이다. 물결처럼 흐르는 곡선과 화려한 색상이 카림 라시드표 디자인의 특징이다.
영감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세상의 모든 문제점"이라고 답했다. 문제를 개선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디자인 원동력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영감을 받는 것이 있다면.
"특히 전 세계로 출장을 다니면서 묵은 호텔이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다. 수많은 유명 호텔 디자인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미학이나 스타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전체 설계와 디자인이 나쁘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화장실 조명이 눈에 편하지 않고 얼굴빛을 칙칙하게 보이게 해 면도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호텔을 디자인할 때 자연광에 가까운 조명을 쓴다. 샤워기 물이 조금만 세면 샤워 부스 바깥으로 물이 흘러넘치는 호텔도 있다. 아무리 외관이 뛰어나도 사용자가 불편하면 안 된다. 호텔 작업을 할 때 이런 디테일에 공을 들인다.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인터뷰 중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을 여러 차례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제품 디자인이 스마트폰 같아야 한다"고 했다. 감각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현시대 감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세상은 유독 외형적인 형태, 디자인이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세상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디지털화되는데 디자인만은 여전히 아날로그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매일 신는 신발도, 거실의 소파도 스마트폰만큼 신선하고 현시대를 반영해야 합니다. 소파는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보던 것과 비슷해야 한다는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유독 디자인에 보수적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을 27번 오가면서 기업들이 색다르고 파격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한국인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진보적인 편입니다. 삼성이나 LG만 봐도 기술적으로 앞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디자인만큼은 보수적입니다. 한국 기업과 일했지만 결국 시장에 못 나온 제품도 있습니다. 그들은 개성이 없고 뻔한 디자인을 찾았어요. 안타까웠습니다. 조금 더 도전적일 필요가 있어요."
—기업이 디자인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디자인은 유일한 브랜드 차별화 요소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신들의 비전과 가치를 자기만의 언어(디자인)로 표현하지 않으면 존속이 어렵다. 기업은 오늘날 세상이 필요로 하는, 현시대와 관련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시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시계 차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시계 제조사는 여전히 과거의 시곗바늘이 그려진 시계를 생산해 내고 있다. 모두 과거에 살고 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어야 미래에 대한 통찰력도 기를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브랜드들이 오래 살아남을까.
"세부까지 살피는 정직한 브랜드만 살아남을 것이다. 예전에 일본 카메라 회사 니콘이 럭셔리 시장에 진출한다고 카메라 외관을 금색으로 도금했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예전과 같은 성능의 카메라에 금을 씌운다고 갑자기 럭셔리로 둔갑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다. 2030년이면 로봇이 대부분 제품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제품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제품에 담긴 기술과 재료, 그리고 이로 인해 느끼는 소비자 경험이 남다를 경우에만 진정한 럭셔리로 분류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하루 7~8시간을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보냅니다. 이런 환경에서 물질적인 세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해요.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색·장식·느낌·언어·형태를 제품에 담아내고 싶어요. 신소재나 최신 공학 공법, 최첨단 기술 등을 디자인에 활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디지털 시대만의 미학을 표현하는 게 목표입니다."
카림 라시드는 한국 기업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현대차·LG생활건강·현대카드·반도건설·아모레퍼시픽 등 많은 한국 기업의 제품 디자인에 참여했다. 그의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그가 디자인한 제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둥근 컵 모양의 뚜껑을 물컵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파리바게뜨의 '오' 생수병, 티타늄 소재로 만든 현대카드의 VVIP 카드 '더블랙', 화장품 브랜드 이자녹스의 하늘색 화장품 용기 등도 그가 디자인했다. 주황색 원 3개가 겹쳐 있는 한화그룹의 로고도 라시드 손을 거쳤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그의 회고전 개막에 맞춰 방한한 라시드는 한국 기업들의 장점으로 전문성을 꼽았다. 그는 "한국 기업들은 전문성이 뛰어나고 시간 약속도 칼같이 지켜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훌륭한 파트너"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한국 기업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시도를 해야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