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보상 없던 돌봄노동, 선택할 기회 생길 것"
"아동수당 도입돼야…지금은 자식 낳은 부부가 불리"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로 전향하는 여자들이 늘어날 거라고요? 이건 돌봄노동을 안해본 사람 얘기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건 정말 힘듭니다. 직장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개발할 목표가 있는 여성이라면, 기본소득을 준다고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윤자영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기본소득 찬성론자 중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진 학자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여성의 고용, 일 가정 양립 등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연구해온 그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여성이 하고 있는 돌봄노동이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활동으로 인정받게 되는 패러다임 전복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국 여성들에게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를 합한 돌봄노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성인여성의 평일 가사노동 평균시간은 3시간25분, 남성은 39분이다. 맞벌이 가구 증가로 격차가 줄어든 게 이 정도다. 이렇게 오랜기간 가사노동을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게 윤 교수의 주장이다.
지난달 11일 대전 유성구 충남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윤 교수는 "기본소득은 여성들에게 시장노동 대신 돌봄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고 강조했다. 돌봄노동을 선택하고 싶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가야 했고, 동시에 돌봄노동까지 떠맡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줄 경우 근로의욕이 커질지 혹은 작아질지가 논란인 상황에서 그는 근로의 ‘선택권’에 방점을 찍었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그런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집안일은 여성의 몫이라는 관념이 오랫동안 공고히 자리해온 사회에서 몇 십만원에 불과한 기본소득은 노인수당, 아동수당 등 다른 수당처럼 사회보장제도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시각도 팽배하다.
윤 교수도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임금노동만 가치있는 경제 활동으로 인정 받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아젠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돌봄노동이 아주 당연하고 보상할 필요가 없는 행위로 치부되면서 출산율이 낮아지고 사회 재생산이 안되는 문제들이 있었는데 기본소득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 “스스로 선택해 돌봄노동 하는 세상 열릴 것”
- 기본소득은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회사에 고용돼 임금을 받고 일하는 시장노동만이 생산적인 경제 활동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을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로운 활동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은 어떤 의미인가.
“누군가는 할 수 밖에 없는 돌봄노동을 그동안 여성들이 많이 해왔다. 그런데 그에 대한 보상은 없고 마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처럼 평가 받았다. 사회적 기여를 했지만 오히려 연금 제도에서 배제되고, 이혼했을 때나 일상적으로 배우자에게 의존적인 존재로 대우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과거에는 열심히 자녀를 돌보면 노후에 봉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즘엔 그렇지도 않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임금이 없거나 적다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저평가 받았던 일도 그 가치를 인정 받게 된다. 돌봄노동이 대표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돌봄노동을 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당장 먹을 게 없어서 생업에 뛰어든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은 돌봄노동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생긴다.“
-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로 전향할 수도 있다. 여성 고용률 높이기가 정책 목표이기도 한데, 이런 상황이 바람직할까.
“생계를 이유로 억지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에 종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기본소득을 받고 일을 그만뒀다면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거나 돌봄노동을 더 선호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 경력을 개발할 목표가 있다면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일을 그만두진 않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준다고 전업주부로 전향할 것이라는 생각은 돌봄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돌봄노동을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돌봄노동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도 24시간 풀타임으로 하면 정말 힘들다고 한다.
또, 기본소득이 돌봄노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준다면 이를 더 장려하고 환호해야 한다.”
- 정부의 여성 고용률 높이기 정책도 근본적으로는 틀린 방향인 건가.
“방향은 맞다. 하지만 그 방식이 노동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지금처럼 긴 노동시간 하에서는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일할 수 없다. 보육시설을 많이 만든다고 하지만 수요에 비해 턱없이 적다.
남녀 전체 근로시간을 단축해야 하고 동시에 최저임금은 올라가야 한다. 시간당 노동 가치가 올라가지 않으면 근로시간이 줄어들 수가 없다. 생계비를 마련하려고 야근에 잔업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노동 환경에서는 남자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일을 오랫동안 하고 사업주는 근로자를 적은 돈으로 최대한 오랫동안 일하게 만들려고 하고,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 “아동수당 필요…자녀 가진 부부의 재정적 외부효과 최소화”
- 기본소득은 얼마나 줘야 할까
“성인보다 아동에게 더 많이 줘야 한다. 인간 생존에 필요한 것은 의식주 뿐 아니라 돌봄도 있다. 이 돌봄에 드는 비용도 기본소득에 포함돼야 한다. 타인의 돌봄이 필요없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건강한 성인보다는 아동에게 더 많은 돈이 지급돼야 한다.”
- 기본소득이 출산율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자녀 부양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때문에 긍정적일 것이다. 불안한 소득 때문에 아이를 갖고 싶어도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도움이 될 것 같다.”
- 아동수당은 어떻게 보나
“찬성한다. 국가가 자녀를 양육하는 책임을 개별 부모에게 전적으로 지우는 것은 분배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부모를 둔 자녀와 그렇지 않은 아동 간에 격차가 생기고 불평등이 심화된다.
재정적 외부효과(fiscal externality)도 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려면 엄청난 돈이 드는데, 자녀들이 자라면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의 연금까지 부담하는 구조가 된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가진 부부들이 손해를 보게 된다.
이런 사회시스템이 고착화되면 출산과 돌봄노동에 대한 유인이 떨어진다. 차라리 시장노동을 해서 내 노후를 책임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 아동수당은 부모에게 지급될텐데, 자식이 아니라 본인에게 쓰면 무용지물이지 않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자녀들에게 투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던 저소득층 가구에게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자신들이 번 돈으로 충분히 투자하고 있었던 중산층 이상 가구는 아마 아동수당을 받아 양육 이외의 목적으로 쓸 수도 있다. 근데 그게 문제인지 모르겠다. 이미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국가가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나.”
◆ 윤자영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이화여대 여성학·문학 석사,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Amherst 경제학 박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