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산업 연구 단지인 판교 테크노 밸리경기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에 조성된 지 10주년을 맞았다. 이 밸리에 입주한 기업체는 1000곳이 넘고 일하는 근로자 수도 7만여명에 달한다. 조선비즈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요람으로 자리잡은 판교 테크노밸리의 현황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심층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쓰으윽 ~~위이잉~’

최근 송창민 안랩 차장은 야근을 마치고 판교역으로 가다가 깜짝 놀랐다. 사옥에서 판교역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는 데 맞은 편에서 희끄무레한 귀신같은 것이 점점 자기한테 다가왔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유령’의 정체는 1인용 이동기구인 전동휠을 타고 다니는 판교의 평범한 엔지니어였다.

“사실 판교 테크노 밸리에서는 전동휠을 타고 다니는 엔지니어를 왕왕 봐요. 그날은 어둑한 밤이었고 다리 근처 산책로에 무성하게 자란 수풀 때문에 전동휠이 가려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송 차장이 빙그레 웃으며 그날 일을 떠올렸다.

인포그래픽=이진희 디자이너

공무원들이 책상 위에 도면을 놓고 첨단 연구 단지를 계획해 착공에 들어간 것은 10년 전인 2006년이다. 단지에 기업들이 입주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다. 불과 5년여 만에 경기 성남시 삼평동의 판교 테크노 밸리는 독특한 문화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기술의 심장으로 성장했다.

2011년 안랩을 시작으로 2013년부터 엔씨소프트, NHN엔터테인먼트, 네오위즈 등이 판교 테크노 밸리에 입주했으며 넥슨과 한글과컴퓨터 등도 판교에 자리를 잡았다. 카카오는 2012년 하반기에 판교에 입주했고, 2014년 포털업체 다음을 인수한 이후 2015년 4월부터 판교 사옥에서 통합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판교 테크노 밸리 입주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6일 오전 전동킥보드(위)와 전동휠을 타고 출근하고 있다.

판교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수많은 엔지니어들과 일하다보니, 한눈에 엔지니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청바지에 티셔츠나 가벼운 재킷 하나를 걸친 캐주얼한 옷차림에 백팩(가방)을 메고 손에는 ‘아이폰’이나 ‘갤럭시’ 등 최신 IT기기를 들고 있으면서 젊은 남자라면 ‘열에 아홉’은 엔지니어라는 것이다.

실제로 취재팀이 지난 1일 오전 9시 판교역에 갔을 때 캐주얼 차림에 백팩을 멘 젊은 남자들이 구름처럼 판교역을 빠져 나왔다. 개발팀은 구성원 사이의 유대 의식이 강해 팀원끼리 후드티를 맞춰 입고 다니기도 한다. 프로젝트명이 적힌 후드티를 입은 사람은 거의 100% 개발자다.

판교 테크노 밸리 입주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출근하기 위해 판교역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

판교 밸리는 66만1000㎡에 걸쳐 조성됐다. 엔씨소프트처럼 판교역에서 7~8분 거리에 있는 곳도 있지만, 넥슨과 SK플래닛(15분 이상 거리), 크루셜텍이나 아이코닉(25분 정도 거리) 등 판교역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업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을버스로 이동하지만, 자전거와 한발 바퀴나 두 바퀴 달린 전동휠(wheel), 킥보드 등을 타는 사람도 꽤 된다. 게임업체인 NHN엔터테인먼트는 전동휠을 타고 출근하는 엔지니어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취재진이 출근길에 만난 이 회사의 한 개발자는 1번 출구로 나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전동휠을 내려놓고 바로 올라타 회사로 향했다.

4월 들어 날씨가 따뜻해지자 ‘자출족(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눈에 띄게 늘었다. 판교 밸리 건물 마다 있는 자전거 주차창에는 수십 대의 자전거가 줄지어 있었다. 서현동 등 주로 판교 인근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많이 이용한다.

경기도가 지난해 발표한 '판교테크노밸리 입주기업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말 기준 판교테크노밸리에 근무하는 전체 근로자 수는 7만577명으로 집계됐다. 엔씨소프트(036570)등 대형 IT기업들이 본격적인 입주를 시작한 2013년의 3만6000여명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이 가운데 연구 인력은 1만3527명으로 전체 인력의 18.2%를 차지했다.

판교 밸리는 전형적인 남초(男超) 지역이다. 같은 조사 자료에서 근로자 7만명 중 여성인력은 7021명으로 9.48%에 불과했다. 공대 출신의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무직 군에서도 남자들이 많았다.가령, 엔씨소프트 홍보실의 경우 남성 직원이 4명, 여성 직원이 2명이다.

연령별로 보면 20~30대 젊은 층이 76%에 달하며, 특히 30대의 비중이 52%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거주지 분포는 성남시가 27%, 성남외 거주자가 73%였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다 최근 아프리카TV IR 담당으로 자리를 옮긴 이대우 팀장은 “대학 시절 공대생들이 건물 뒤에서 우유팩을 자주 찼는데 판교 밸리에서는 ‘팩’ 을 차는 대신 ‘드론’을 날리는 IT 매니아들을 자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넥슨코리아, NHN엔터 등 판교테크노밸리 입주기업 직원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

실제로 개나리가 핀 판교테크노공원, 벚꽃이 만개한 판교테크노밸리 중심가인 H스퀘어에는
'드론(drone·무인비행기)' 3~4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김은미 엔씨소프트 과장은 "드론을 날리거나 전동휠을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판교는 IT기술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묻어 나온다"고 말했다.

강남이나 여의도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화이트 칼라의 전형적 차림새인 정장을 입은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판교에서는 정장 차림을 찾아보기 힘들다. 겉모습부터 다양성이 지배하는 곳이다.

디지털 노트 솔루션 기업 한컴플렉슬 이창일 대표는 “나도 소프트웨어 개발자 출신이라 개발자 특유의 취미 활동을 잘 이해하는 편”이라면서 “판교 밸리 지역의 개발자들이 모여 ‘프라모델(조립식 장난감)’을 만드는 경우를 여러 차례 봤다”고 말했다.

카카오 직원이 판교 오피스 사내에서 킥보드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경기도에 따르면 2014년말 기준 판교테크노밸리 내 입주기업은 1002개로, 입주 초창기인 2011년(83개)에 비해 1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보다는 132개가 늘어난 수치다. 특히 IT기업은 643곳으로 전체 입주기업의 64%를 차지했다. 이는 2011년 46%보다 18%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판교테크노밸리가 국내 IT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판교에 입주한 업체들도 집적효과를 누리고 있는데, 특히 국내 10대 게임사 중 7곳이 판교에 있고, 국내 상장 게임사 전체 매출의 85%가 판교에서 나온다.

인포그래픽=이진희 디자이너

‘연구개발단지’인 판교테크노밸리와는 달리 제2판교테크노밸리는 ‘첨단산업단지’로 조성된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이곳을 1단계 첨단산업단지로 지정했고, 올해 3월 착공에 들어갔다. 올해 안으로 2단계 첨단산업단지도 지정한다.

장동운 경기도 산업정책과 주무관은 “기업들로부터 입주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현재 입주기준을 마련하고 있다”며 “내년 1월부터는 2단계 첨단 산업단지 분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