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킬 서발 지음|김승진 옮김|이마|456쪽|1만8000원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큐비클에 갇혀 있구나."

큐비클(cubicle)이란 한 사람씩 들어갈 수 있게 된 작은 사무 공간을 뜻한다. 큐비클의 합이 사무실이다. 우리의 소망이자 일터이자 전쟁터 말이다. 청춘들에겐 꿈이지만, 정년을 앞둔 누군가에겐 집보다 편한 곳일 수도 있는 곳.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자리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남자는 캐비닛에서 서류를 꺼낸다. 별일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구부정 남자가 서류 한 다발을 동료에게 집어 던진다. 동료 직원이 뒤로 물러서며 피하는 사이, 구부정 남자는 거대한 컴퓨터 모니터를 들어 올린다. 구시대 유물 같은 배불뚝이 브라운관 모니터다.

그 모니터를 들어서 옆 큐비클 쪽으로 밀치니 모니터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져 연기를 낸다. 구부정 남자는 섬뜩하리 만큼 침착하게 바닥에서 서류를 주워 모으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놀라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에게 냅다 던진다. 서류들은 거대한 종이 눈꽃처럼 팔랑팔랑 떨어진다. "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로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저 장면이 주는 통쾌함. 저자는 책 머리를 그렇게 시작한다. 상사의 호통이 시작되면 머릿속에서는 모니터랑 종이 서류 중 무엇을 집어던질까 고민해보게 만드는 곳. 이 책은 그곳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 사무실에서 펼쳐지는 고통의 역사는 만국 공통인 모양이다. 456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도 쉬 읽힌다.

이 책으로 데뷔했다는 저자의 글은 재기발랄함과 통찰력을 함께 갖추고 있다. 사무실이라는 장소를 통해 우리의 노동과 노동 공간의 변천사를 재미있게 탐구했다.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를 '사무원 계급'이라는 신(新) 계급의 탄생 과정에서 시작한다. 뒤이어 '흰 블라우스의 혁명' '회사남, 회사녀'와 같이 호기심 만점의 제목을 앞세운 분석을 거쳐 '미래의 사무실'을 전망한다. 결국에는 '누구를 위하여 사무실은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그러고 보니 그토록 많은 현대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면서도 정작 사무실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짧게는 주 5일, 길게는 일주일 내내 소일하는 이 곳을 제대로 분석한 글도 읽어본 적이 없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뉴욕만 해도 사무직 노동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행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서류 업무를 보는 사무원 계층은 급증했지만, 이들의 일은 농사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은 제대로 된 노동 축에는 들지 못했다. 즉 '남자답지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산업의 발달은 점점 더 많은 사무실을 만들어 냈고,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은 화이트칼라가 사무실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조직의 핵심, 산업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남자답지 못한 일'은 '지식 노동'이라는 말로 대체됐다.

화이트칼라의 그림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이트칼라는 고층 건물과 칸막이로 대표되는 사무실에 갇혀 바로 옆 동료와도 단절된 채 모두와 경쟁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자본은 사무실을 통해 화이트칼라를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저자는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야말로 산업혁명 이후 일어난 산업 구조와 노동시장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쓴다. 이제 사무실은 심리학과 인체공학 같은 첨단 학문에 기반해 디자인되지만 오히려 노동자의 억압과 고립에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인 예가 '테일러주의'의 도입이다. 화이트칼라의 지식노동은 규격화됐다. 심지어 펜, 봉투, 타자기, 영수증 양식, 파일 캐비닛까지 규격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그게 편리한 메뉴얼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속박이다.

그 후에도 사무실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불어온 일-레저 경계 파괴형 사무실은 국내에도 밀려드는 중이다. 반대로 차별과 불평등, 통제를 강화하는 사무실도 계속 변형돼 나오고 있다. 마치 죄수들을 감시했던 판옵티콘(원형감옥)처럼 말이다.

책을 덮고 나면 사무실이 달리 보인다. 이 공간에 그런 역사가 숨어 있었던가. 여러 장면과 생각들이 오버랩된다. 그만큼 흥미를 유발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