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철 서강대 교수

1942년 영국에서 발표된 '베버리지 보고서'는 2차 세계대전으로 궁핍에 빠진 영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보다 진일보한 사회보장정책의 원칙과 계획을 담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 생애를 보장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20세기 후반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이 됐다.

16세기부터 영국은 ‘구빈법’을 통해 빈민에 대한 공공부조 정책을 시행했다. 18세기에는 구호액 규모가 국민소득의 2%에 달할 만큼 확대됐다. 하지만 구빈법이 빈민들의 자립심과 노동 동기를 저하시킨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1834년 신구빈법 제정 후 빈민에 대한 공공부조 대상과 규모를 점차 줄여 나갔다.

이후 1911년 제정된 국민보험법은 보험료를 납부하는 기여방식에 따라 지급하는 의료보험과 실업보험제도를 실시했다. 사회보장 방법을 종래의 공공부조 방식에서 사회보험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공공지출 범위와 대상이 제한적이라는 한계로 인해 사회보장제도로는 미흡했다.

그 후 나온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겠다'는 베버리지 보고서 계획은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온 직후 영국은 가족수당법(1945년), 국민보건서비스법(1946년), 국민부조법(1948년), 아동법(1948년) 등의 개정과 신설을 통해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를 확립시켜 나갔다. 무엇보다 직업, 소득, 연령 등에 관계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했으며, 연금보조, 의료서비스는 물론 결혼수당, 임신수당, 아동수당에서 장례수당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과도한 복지지출로 인해 1970년대 들어 영국의 사회복지 지출은 정부 예산의 40%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1차 오일쇼크를 경험한 직후인 1976년 급기야 IMF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른다. 또한 필요 이상의 복지혜택이 만연하면서 재정의 비효율성과 노동의 비능률성 문제도 제기됐다. 소위 ‘영국병’으로 불리는 고복지,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와 그에 따른 경기침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2012년 영국은 복지개혁법을 제정함으로써 1940년대 이후 사회보장 정책에 큰 변화를 시도했다. 새로운 복지개혁법은 일을 하게 하는 유인체계를 만들어 노동공급과 소득을 증가시키고, 복지 혜택의 수급조건을 강화해 궁극적으로 정부 지출을 줄이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개혁안은 오랫동안 시행됐던 임신보조금을 없앤다거나 아동출연기금 및 교육유지수당의 추가 지원을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다.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겠다는 베버리지 보고서의 청사진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국의 경험은 유럽 여러 국가에서 유사하게 관측된다. 일반적으로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복지 팽창기였다. 영국에서 처럼 포괄적인 복지와 복지수혜자의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복지혜택이 절정을 맞았다. 소득보장은 물론 보건의료, 주택, 교육 등 여러 부문의 서비스를 국가가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당시 유럽 국가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러나 사회보장의 범위와 대상 확대는 과도한 복지지출로 이어졌고, 이는 2010년 전세계를 긴장시켰던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제 대표적 복지국가인 스웨덴을 포함한 유럽국들은 복지 수혜자의 책임성과 자기부담 원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개편하고 있는 중이다.

2012년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지출 규모는 국민소득의 10.5%로 영국의 사회보장 절정기였던 1970년대 초 수준과 비슷하다. 최근 20년 간 그 비중이 3배 가량 빠르게 증가했지만 OECD 회원국 평균인 22.1%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지출이 더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난 세기 영국의 경험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 생애를 보장하는 정책을 지속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복지, 고비용, 저효율로 나타난 영국병은 지속가능한 양질의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는지 못지않게) 사회보장 지출의 효율성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1970년대 시작된 영국의 고민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현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역시 우리에게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