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기든스 지음ㅣ이종인 옮김ㅣ책과함께ㅣ336쪽ㅣ2만원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유럽의 비극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주 넓은 지역에서 고통받고 굶주린 사람들이 폐허가 된 그들의 도시에서 경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방이 있습니다. 유럽 대륙이 평화, 안전, 자유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유럽 합중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1946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유럽합중국 건설'을 주창했던 연설의 일부다. 이후 통합 논의를 지속하던 유럽은 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유럽연합(EU)을 출범시켰다. 그들은 국경의 장벽을 낮추고 단일 통화인 유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EU는 출범 20년이 지난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유로화가 붕괴될 것이란 전망까지 곳곳에서 나온다.
'제3의 길'을 통해 신혼합경제를 주장했던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신작 '유럽의 미래를 말하다'에서 통일된 대륙을 구축하는 사업이 붕괴 위기에 놓였다고 진단한다. 유로화 체제의 불안과 재정 위기, 사상 최고의 실업률,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로 유럽 대륙은 강력하기는 커녕 소란스럽기만 할 뿐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기든스는 EU를 구성하는 두 개의 행정 조직에 대한 운영 문제를 거론한다. 하나는 평상시 업무 집행 역할을 하는 'EU1'으로 이사회·집행위원회·유럽의회로 구성됐고 또 다른 하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이 비공식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EU2'다. 기든스는 막강한 실권을 갖고 있는 EU2가 EU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한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기든스는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EU1'과 'EU2'가 더 긴밀하게 통합돼 운영되고,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제도화된 리더십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U가 민주적인 리더십을 구축해 금융 및 재정 분야의 통합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연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가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글로벌 경쟁에서 유럽이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유럽차원에서 외교 및 군사 분야까지 통합을 확대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동시에 2010년 그리스발 경제위기 당시 EU의 대응 정책을 세세하게 소개하며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EU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독일의 승인으로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에 나섰지만 민영화 프로그램에 치중했다. 기든스는 "민영화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며 개혁의 범위를 확대·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조세 회피를 막기 위해 조세 피난처에 대한 조치를 서두르고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그리스에 대한 인프라 투자, 특히 에너지와 수송 분야에 대한 투자를 통해 유럽 전역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지국가의 제도 존속을 위해선 사회적 투자 국가(social investment state: SIS)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SIS는 부의 창조를 목표로 교육과 기술의 장려, 사회적·경제적 참여를 적극 추진한다. 그가 제3의 길에서 제시한 적극적 복지를 조금 더 확대한 것으로 '창조경제'와 유사한 개념이다. 시민들에 대한 지속적인 재교육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직업안전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기든스는 이 밖에 새로운 산업 체계 구상, 자국 기업 국내 유치와 청년 도제 시스템을 통한 실업률 해결, 신재생 에너지를 통한 환경 문제 개선 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법도 제안한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만드는 새로운 세상에서 유럽 대륙이 '운명의 공동체'로서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방안으로 기든스는 '통합 유럽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처칠의 연설문을 화두로 시작한 이 책은 마지막에 처칠의 한 마디를 재인용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유럽을 일어서게 하라!" 유럽 합중국을 꿈꿨던 처칠, 열렬한 유럽통합의 지지자인 기든스의 '통합 유럽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