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화학부 건물 내 실험실에서 실험 장비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서정헌(오른쪽)·백명현 명예교수.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이공계 대학교수는 은퇴하고 나면 퇴역한 장군과 같아요.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군사(연구원)와 장비(연구실) 그리고 군수품(예산)이 끊겨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은퇴는 곧 과학자로서의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구조입니다. 영국, 일본 등에서 은퇴한 과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과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지난 5월 2일 서울대학교 화학부(501동) 명예교수실에서 만난 서정헌·백명현(66) 명예교수(이하 교수)는 각각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정년을 맞았다. 1977년 두 사람이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지 만 36년이 흘렀다. 이 부부가 스스로를 ‘퇴역한 장수’에 비유한 것처럼 서울대는 만 65세 정년이 되면 교수 또는 과학자로서 모든 권한을 내려놓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두 사람은 개인 연구실이 없다. 이날 인터뷰는 세 명의 명예교수가 함께 사용하는 작은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백명현 교수는 “은퇴한 과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고령화사회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교수나 과학자의 업적을 평가해 연구가치가 있는 건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단기과제가 아닌, 장기과제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과학계 연구 1세대로 통하는 서정헌·백명현 교수는 ‘국내 1호’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국내 화학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부가 각기 한국과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부부과학자다. 또 부부로는 처음으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경기고를 나온 서 교수와 경기여고를 졸업한 백 교수 모두 자랑스러운 경기인상을 수상한 첫 번째 부부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두 사람은 국내 화학계와 여성 과학계에서 주는 각종 상패의 1호 수상자 타이틀을 갖고 있다. 서 교수는 1997년 한국과학상 화학 분야의 첫 번째 수상자였고, 백 교수는 2001년 제1회 여성과학기술자상을 받았다.

두 사람 가운데 화학계와 언론의 조명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백 교수다. 백 교수는 “남편은 초창기 화학계를 이끌었고 나는 한참 뒤에 성과를 인정받았다. 남편이 화학계의 조용필이라면 난 소녀시대쯤 된다. 최근에 와서 내가 더 주목을 받았을 뿐 남편이 화학계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교수로서 정년을 맞았지만 과학자로서 두 사람의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울대 명예교수에 머물지 않고 외부로 활동무대를 넓혔다. 백 교수는 한양대 화학과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남편인 서 교수도 현재 서강대 인공광합성연구센터에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백 교수는 “과학자 또는 교육자로서 조금 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면서 외부 연구 및 강의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

서 교수는 생유기화학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했다. 생유기화학이란 유기화학적 기법을 통해 생물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학문인데, 쉽게 말하면 생명체의 구성 성분 또는 탄소화합물을 조금씩 변화시켜 질병을 치유하는 연구 분야다.

서 교수의 대표적 연구 성과물은 단백질분해효소의 일종인 인공프로테아제의 발견이다. 인공프로테아제는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같은 아밀로이드병으로 불리는 난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효소의 일종이다. 이 효소는 인공광합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인공광합성은 태양, 탄산가스, 물을 이용해 녹말을 만드는 것인데, 여기에 적절한 촉매를 쓰면 인공효소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는 아밀로이드병의 원인인 나쁜 단백질을 효소로 분해하는 것이다. 인공 효소가 인체에 들어가 발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 조각을 잘라내면 병을 치유할 수 있다. 단백질은 조금만 변형이 가해져도 그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에 이런 치료가 가능하다. 다만 정상적인 단백질을 건드리지 않고 정밀하게 병인이 된 단백질만을 골라 잘라내는 게 중요하다.”

알츠하이머, 광우병, 파킨슨병, 당뇨병 등 아밀로이드병으로 불리는 질병은 크게 15개 정도가 있다고 한다. 서 교수는 표적 단백질만 인식해 이를 제거하는 프로테아제를 200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해 화제가 됐다. 그전에는 효소의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분자량 단위로 효소의 모형, 즉 작용방식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 토대 위에서 의학과 결합해 알츠하이머 등 난치병을 치유하는 프로테아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 교수의 연구는 은퇴와 동시에 사실상 정지된 상태다. 그는 당뇨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효소를 만들어 세포실험을 끝냈지만 정년을 맞아 동물실험으로 연결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만약 동물실험까지 성공했더라면 국내외 제약사에서 내 연구결과를 사가려고 했을 거다. 외국에서 누군가 이 연구를 끝내기 전에 후배들이 관련 연구를 매듭짓고 치료제를 개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 교수는 요즘 서강대 인공광합성연구센터에서 탄산가스를 환원시켜 녹말이 되기 전 단계에서 메탄가스나 메탄올 등 경제성 있는 물질로 변환하는 연구를 돕고 있다고 했다. 탄산가스에 수소나 산소를 결합시켜 광합성을 하면 연료 등으로 쓰이는 메탄가스나 메탄올을 만들 수 있다.

백 교수는 전이금속화학계의 세계적 연구가로 명성을 얻은 과학자다. 전이금속이란 청동기나 철기 등을 말한다. 남편인 서 교수가 화학을 의학과 결합시켰다면 백 명예교수는 금속과 환경에 주목했다.

백 교수의 대표적 연구성과는 다공성배위고분자의 합성과 이산화탄소의 선택적 포집 등이다. 과학 용어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된다. 먼저 다공성배위고분자의 합성에 대한 백 교수의 설명이다.

“수소차를 만들려면 수소가스를 저장해야 한다. 그러나 수소탱크는 사이즈가 크다. 예컨대 수소차가 8시간 정도 운행하려면 수소 5㎏이 필요한데, 이 정도면 현재 기술로 자동차 크기의 절반을 수소탱크로 만들어야 한다. 크기도 문제지만 부피가 커질수록 폭발 위험도 커진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미세다공성물질을 고안했다. 수소는 표면에 밀착돼 압축되는 성질을 갖는데, 이 점에 착안해 나노 사이즈로 초미세 공간과 면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3면이 1㎝인 공간에 미세다공성 공반을 만들면 손톱만 한 크기의 공간을 축구장 크기만큼 확대할 수 있다. 가설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다. 나노 사이즈로 채널을 뚫고 내가 원하는 위치와 모양을 만들 수 있도록 물질을 섞는 방식도 발견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 교수가 부연설명을 했다. “1m를 직선으로 가면 그냥 1m지만 그 안에 곡선을 넣으면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미세공간을 수없이 만들면 표면적은 얼마든지 확대가 가능하다. 이게 백 선생이 성과를 낸 다공성배위고분자의 합성이다. 거기다가 수소를 저장하면 탱크의 압력도 높이고 저장용량도 몇십 배로 늘릴 수 있다.”

백 교수는 또 지구온난화의 원인인 이산화탄소만 배출가스에서 빼내 땅속에 영구저장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했다. 이른바 이산화탄소의 선택적 포집이 바로 그것이다.

“공장 배출가스에서 이산화탄소만 뽑아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나는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고 , 가능한 아이디어를 찾았다. 구멍이 아주 작은 금속유기체를 통해 다른 가스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이산화탄소만이 통과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다공성배합물은 구멍을 작게 하고 유연하게 만들 수 있는데 밀고 들어가는 힘이 강한 이산화탄소의 성질을 활용, 다른 가스는 튕겨져 나가고 오직 이산화탄소만 통과되는 금속유기체를 고안했다. 이렇게 포집된 이산화탄소는 땅에 묻거나 플라스틱을 제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이 부부과학자가 화학자로서 남긴 족적을 보면 정년 이후 연구가 중단된 게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백 교수는 유년 시절 전라북도가 낳은 천재소녀로 통했다. 전북 전주시가 고향인 그는 전북도 전체에서 몇 년에 한 번 나온다는 경기여중 합격자였다. 이어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남편과 함께 미국 시카고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원래 화학과 교수가 아니었다. 서울대 사범대 화학교육과 교수로 처음 임용됐다. 사범대는 화학과처럼 연구시설이 없어서 주로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화학연구를 했다. 다공성배위고분자의 합성 같은 연구성과는 연구실에서 탄소나 금속을 섞는 방식의 연구로는 성과를 낼 수 없는 과제였다.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화학물질을 만들어낸 것이다.

“교수로 임용된 지 23년 만에 화학교육과에서 화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실험실이 없던 화학교육과 시절의 악조건이 나를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승부하게 만들었고 결국 국제적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도 세계 화학계가 내 연구방식을 호평하는 이유는 실험이 아닌 상상력으로 접근하는 연구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국내 학계도 외국처럼 연구성과를 평가해 정년 이후에도 연구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정년을 마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일본이나 유럽이 노벨상 경쟁에서 앞서는 건 나이 든 사람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장기적 안목에서 과학을 육성하는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백 교수도 최근 지인과의 대화를 소개하며 남편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아는 교수 한 분을 만났더니 올해 자기 나이가 60세라며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최소 5년이 걸리는데 정년이 될 때까지 학위를 마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까봐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과학자로서 연구가 단절되는 것이다. 좋은 연구목표를 가진 분들이 세계적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했으면 좋겠다.”

서정헌·백명현 교수 부부의 가족은 모두 박사학위를 받았다. 큰아들 서종욱씨는 미국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항공우주국(NASA) JPL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큰딸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막내딸은 이화여대 목동병원의 재활의학과 교수로 있다. 결혼한 맏딸의 남편도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박사다.

이 부부의 자녀 교육법은 자발성과 창의성에 있다.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보내는 다른 가정과 달리 서 교수의 자녀 3명은 사교육 혜택을 받지 않았다.

백 교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면담을 하는데 학원이나 과외를 하면 자녀 성적이 좋아질 거라고 권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들이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공부를 강요하지 않은 건 잘한 것 같다. 애들이 자기 영역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며 잘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도 암기식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며 “아이들은 놀면서 스스로 지식을 터득하는 방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교육자로 일한 지 37년이 됐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들의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걸 느꼈다. 우리 교육 시스템하에서 모범생은 혼자 도전하는 걸 잘 못한다. 지금 학부모 입장에서 1~2점이 중요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다. 계산 같은 건 이제 컴퓨터가 다 한다. 인간은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새로운 상상과 창의적 영역에서 도전해야 한다. 제자 중에 입학 당시 친구들에게 밀려 변변치 못했던 학생이 있었지만 자극을 주고 독려하니까 오히려 암기 잘하는 모범생보다 더 훌륭한 인재가 됐다.”

서정헌·백명현 교수는 대학 내에서는 완전히 남남처럼 지냈다. 대구 출신의 서 교수가 무뚝뚝한 탓도 있지만 보수적인 학내 분위기 때문에 점심 한 끼 같이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나중에는 이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됐지만 습관처럼 두 사람은 남보다 멀게 지냈다.

백 교수는 “서 선생이랑 대학에서 점심식사를 처음 한 건 작년에 정년을 하고 나서다. 그전에는 한 번도 학교 안에서 식사를 같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걸 잘했다는 점이다. 아이들도 아빠를 무척 좋아하고 따른다”고 말했다.

이 부부는 1967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동기다. 이듬해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결혼했다. 올해로 결혼 44년차. 요즘은 남편인 서 교수가 빨래와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두 사람은 화학계 발전을 위해 “후배들이 단기성과보다 장기과제에 도전하는 연구 분위기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교수는 정년이 보장된다 해서 안이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열심히 연구한다. 일본이나 영국처럼 교수들이 제자들과 한 팀을 이뤄 다양한 과제를 깊이있게 연구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단기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세계 화학계를 주도할 수 있는 장기적 과제에 주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문화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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