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 프랑스 파리의 한 파티. 브라질 출신의 비행사인 산토스 뒤몽(Dumont)은 친구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에게 "비행 중 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창업자인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의 손자로 유독 시계에 관심이 많아 보석 세공술 등을 이용해 시계를 만들고 있었다. 당시 휴대용 시계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나 허리에 차는 샤틀렌 시계가 대부분이었다.

까르띠에는 이 말을 농담으로 넘기지 않았다. 시계 제조자 에드몬드 예거(Jaeger)의 도움으로 개발에 착수했고, 1904년 비행 중 조종기에서 손을 떼지 않고도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손목에 착용하는 시계를 고안했다. 세계 최초 '손목시계'의 탄생이었다. 까르띠에는 이 시계를 친구의 이름을 따 '산토스'라 명명했다.

①1900년대 비행사 산토스 뒤몽. ② '산토스 드 까르띠에’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2004년 출시된 ‘산토스 100 골드 앤 스틸'. ③ '산토스 100'의 옆모습. ④시계 앞면에 무광택의 티타늄 소재를 사용한 ‘산토스 100 카본스틸 워치’.

손목시계의 탄생

뒤몽은 당대 최고의 '트렌드 세터'였다. 그가 입은 옷이나 착용한 액세서리, 신은 신발은 모두 유행이 됐다. 까르띠에가 뒤몽에게 선물로 준 '손목시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7년 그가 220m를 22초에 비행하는 기록을 경신하고 내렸을 때, 당시 '패션 피플'들은 그의 손목에 착용된 시계에 주목했고 갖고 싶어 했다.

1908년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이런 요구에 따라 '산토스 드 까르띠에(Santos de Cartier)' 시계를 만들고, 일부 고객들에게 특별 주문 제작을 해주었다. 1911~1973년에 본격적으로 시판된 산토스 드 까르띠에 시계는 약 800개가 제작·판매되었다.

당시 산토스의 디자인은 파격적이었다. 시계 제조에 사용되지 않던 소재인 가죽을 채택했고, 전체적인 선은 기하학적 형태로 하되, 모서리는 곡선으로 처리했다. 케이스에서 가죽 스트랩까지 이어지는 조화로운 곡선은 이후 까르띠에 시계 디자인의 근간이 됐다. '산토스 드 까르띠에'는 주머니와 허리에 있던 시계를 손목 위로 드러냄에 따라 시계도 타인의 눈에 보이는 액세서리가 될 수 있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혁신적 디자인의 상징

'산토스 드 까르띠에'의 다음 디자인은 1978년에 출시됐다. 시계에 금과 금속을 함께 쓰고, 대부분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부품인 스크루(케이스를 고정하는 나사)를 드러낸 것이다. 까르띠에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고급 손목시계에는 금만 사용했고 금속은 잘 쓰지 않았다"며 "나사를 과감히 드러낸 것도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새로 출시된 산토스는 유럽과 미국 등에서 화제가 됐다. 1978년 프랑스 파리 인근 브루제 공항에서 열린 출시 이벤트에는 전 세계 유명인사들이 전용 비행기를 타고 대거 참석했다. 이듬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출시 파티에서는 까르띠에가 당대 최고의 발레 스타 루돌프 누레예프에게 산토스 시계를 주는 증정식이 열리기도 했다. 러시아 출신인 누레예프는 '백조의 호수'를 남성 무용수 중심으로 개작하는 등 고전 발레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1980년에는 까르띠에 고유의 컬러인 와인빛 보르도 컬러에 악어 무늬인 '엘리게이터 스트랩'이 부착된 '엑스트라 플랫 모델'이 출시됐다. 1981년엔 다이얼이 보르도 컬러인 '산토스 드 까르띠에'와 방수가 되고 배터리에서 동력을 얻는 전자식 시계인 방수 쿼츠 무브먼트 '산토스 방돔' 시계를 선보였다.

산토스는 지금도 매력적인 인물

당시 '산토스' 시계가 화제가 되자 위조품이 유통됐다. 1981년 까르띠에를 인수한 알랭 도미니크 페렝(Perrin)은 1983년 친구인 조형미술가 세자르(Cesar)와 파리 근교의 주이 앵 조자스에서 '산토스 드 까르띠에' 위조품 시계를 중장비 롤러차로 압축하여 파괴하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까르띠에 관계자는 "위조품 판매자와 구매자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세자르는 이렇게 파괴된 위조품 시계들로 하나의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 장소에는 1년 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들어섰다.

2004년엔 산토스 드 까르띠에 시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산토스 100'을 출시했다. 까르띠에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적인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스크루 베젤은 크게 하고 시곗바늘은 형광으로 했다. 이후에도 까르띠에는 거의 매년 '산토스 100'의 새 컬렉션을 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