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수 홍콩 특파원

미소의 나라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관광 천국이라는 태국에 관광객 발길이 줄었다. 올해 1550만명을 예상하던 관광객은 1300만명으로 목표가 수정됐다. 시위대의 방화로 태국 전체 증권시장과 은행이 이틀간 마비됐다. 정치 투쟁의 파장은 경제도 멍들게 했다.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탁신(Thaksin) 친나왓 전 총리다. 지난 2월 26일 대법원 판결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대법원은 총리 재임 기간(2001~2006년)에 직권을 남용해 부정축재를 했다며 탁신 재산 766억 바트(약 2조8000억원) 중 60%에 대한 몰수형을 확정했다.

2주일 뒤인 3월 12일 북부와 북동부의 농민들이 방콕의 도시 서민들과 합세했다. 탁신 집권 기간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이다. 그 후 10주 동안 반정부 시위대와 군·경은 방콕 시내 곳곳에서 충돌하면서 80명 이상 숨졌고, 2000명가량이 다쳤다.

지난 10주간 시위대는 "탁신 쏘쏘, 깜마 탁신"을 외쳤다. '탁신 힘내라, 돌아와요 탁신'이라는 뜻이다. 시위대와 군·경이 크게 충돌할 때마다 올봄에만 세 번이나 방콕에 와 취재해 이제 귀에 익숙하다.

지난 4월 숙소 근처의 한 마사지 가게. 1시간에 250바트(약 9000원)짜리 발 마사지를 받다가 50대 종업원에게 귓속말로 "탁신 쏘쏘, 깜마 탁신"이라며 떠보자 그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이 손님이 탁신 쏘쏘, 깜마 탁신이래"라고 크게 소리쳤고, 손님이 없어 잡담을 나누던 종업원 5명이 몰려들었다. 내친김에 "아피싯 옥빠이"(아피싯 현 총리는 물러가라는 뜻)라는 시위대 구호를 말해주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태국말은 언제 배웠느냐"며 난리가 났다. 내 어깨를 주물러 주는 종업원도 있었다. 재미가 붙어 택시기사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주면 열에 여덟은 신이 나 했다. 삶이 팍팍한 이들에게 탁신의 인기는 아직도 대단하다.

한 기사는 지갑 속의 의료보험 카드를 꺼내 보이며 "태국 국민은 이걸 보여주고 30바트(약 1100원)만 내면 중병(重病)이 아닌 한 웬만한 치료는 다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택시 기본요금이 35바트인데 그보다 싼 의료보험을 받는 나라는 태국밖에 없을 거예요. 다 탁신 덕분이죠"라고 했다. 의료보험이 택시 기본요금보다 싸면 국가 재정이 바닥날 수밖에 없다는 지적엔 무조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탁신은 30바트짜리 의료개혁을 실시하고, 농민 부채를 대폭 탕감해 주거나 지불을 연기해 줬다. 한쪽에선 '탁시노믹스'라 칭찬하고 다른 쪽에선 포퓰리즘이라 비난했다. 탁신당(黨)은 2005년 총선에서 태국에서 초유의 과반 정당이 됐고, 그는 태국 최초의 연임 총리가 됐다. 자신감이 넘친 그는 국왕에 도전하는 모습도 보이다 2006년 9월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부패죄로 징역 2년이 선고된 그는 구치소행을 거부한 채 막대한 시위자금을 쓰며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시위대를 선동했다. 태국 역사상 쿠데타로 쫓겨난 19명의 총리 중 국왕의 결정(쿠데타 승인)에 반기를 든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위력은 2010년 봄 태국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강제진압 이후에도 그 불씨는 여전하다. 태국은 큰 숙제를 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