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집권 당시 한국이 러시아에 경제협력 차관 명목으로 제공한 14억7000만달러(1조3671억원)는 어떻게 됐을까.
16년이 지났지만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그 돈의 행방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항간에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느니, 무기로 대신 받았다느니 온갖 소문이 나돈다. 한국은 러시아측에 제공한 경협 차관을 과연 상환 받은 것일까.
결론은 아직까지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 상환 받았을 뿐이다. 지난 2003년간 타결된 한·러간 상환 협상에 의하면 러시아는 오는 6월1일부터 한국에 경협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환을 시작해야 한다.
현금 상환 시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첫 상환액인 3500만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이 돈을 러시아가 제 때 지급할지 여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러시아에 제공한 경협차관은 지난 1991년 노 전(前) 대통령이 북방 외교를 추진하는 대가로 당시 소련에 제공한 것이다. 총 14억7000만 달러였다. 한국은 당시 10억 달러는 현금으로 4억7000만 달러는 전자제품 등 소비재 차관으로 제공했다.
당초 정부는 모두 30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지만, 그 해 소련이 해체되면서 잔여분에 대한 차관 제공을 중단했다. 차관은 3년 거치 5년 상환으로 약정 이자율은 리보(LIBOR·런던은행간 거래 금리)+1.25%였다. 제공한 차관은 1999년까지 전액 돌려받기로 했지만 러시아가 자국 사정으로 상환을 미루면서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까지 1차 만기 도래한 경협차관의 일부인 4억6000만 달러를 1998년까지 돌려받기로 했지만, 현금이 아닌 현물로 상환하겠다는 러시아측 입장을 수용했다. 이는 러시아제 무기 도입으로 이뤄졌으며, 이것이 바로 국방부가 추진한 ‘불곰사업’이다. 1994년 1차 ‘불곰사업’으로 러시아에서 전차와 장갑차, 휴대용 대공화기, 헬기 등을 받았다. 미국제 무기체계를 갖춘 한국 군에 러시아 무기가 도입된 첫 사례였다.
하지만 1994년 이후 만기가 도래한 차관에 대해서는 거의 10년 동안 상환방식에 대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경협차관은 이자가 늘어 2003년 22억4000만 달러까지 불어났다. 결국 양국 정부는 차관 문제가 한국과 러시아 관계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그 해 채무 재조정에 나섰고, 상환 협상을 마무리했다.
당시 협상안에 따르면 한국은 러시아에 미상환 원리금 22억4000만 달러(이자가 붙어 액수가 늘어남) 중 6억6000만 달러를 탕감해주는 대신, 15억8000만 달러에 대해서는 이자율(리보+0.5%)과 함께 2025년까지 전액 상환받기로 했다.
이중 2억5000만달러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현물로, 13억3000만달러는 2007년부터 현금 상환한다는 데 합의했다. 현물 상환은 2차 ‘불곰사업’으로 이어졌고, T-80U 전차와 BMP3 장갑차, ‘무레나’(상륙작전용 공기부양정)등 6종의 무기 도입을 하기로 했다. 지난해 ‘무레나’ 도입을 끝으로 현물 상환은 끝났다. ‘불곰사업’도 자동 종료됐다.
러시아측에 차관의 3분1이 넘는 부분을 탕감해준 것은 노무현 정부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러시아를 최대한 배려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북핵 문제가 불거지자 한국 정부가 러시아측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러시아의 경제 성장을 예측 못한데다 지나치게 러시아의 입장만을 수용한 실패한 협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제 우리나라가 러시아로부터 받아야 할 차관은 13억3000만달러(1조2369억원)가 남았다. 양국 정부가 2003년 체결한 협정에 의하면 이 돈은 올해 6월부터 매년 두 차례로 나눠 3500만 달러씩 현금으로 돌려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최근 수년 동안 석유와 가스 수출로 인한 오일달러 유입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4월 현재 3463억 달러에 이른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다. 러시아는 국제사회 신용회복을 위해 외채를 조기 상환하는 등 채무 이행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06년 초 1000억 달러 규모였던 외채는 2007년 현재 520억 달러로 줄었다. 이마저도 내년까지 완전 상환한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제공한 경협차관도 제 시간에 상환할 것으로 우리 정부는 낙관해왔다.
'2007년 6월부터 원리금 상환' 재약속 해놓고선
돈 많은 러시아, 또 다시 현금 대신 현물로 주겠다는데…
그러나 러시아가 당초 약속한 현금 상환 대신 또다시 현물로 상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꼬이고 있는 중이다. 러시아는 2003년 채무 조정 합의 이후부터 최근까지도 경협차관을 방위산업 물자로 상환하겠다는 입장을 수 차례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실제로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정상회담과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차관을 현금이 아닌 현물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 2003년 당시 양국의 협정안이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 양국은 '2007년부터 상환하는 차관에 대해 현금 상환을 원칙으로 하지만, 양국이 합의할 경우 현물로도 상환할 수 있다'는 부속조항을 집어 넣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우리 정부는 러시아측으로부터 현금이 제때 들어올지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최근 갈수록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높아가고 있는 러시아가 현물을 제공하겠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경제 호전으로 외채 상환 능력이 있는 만큼 재협상을 통해 상환시기를 앞당기든지 자원개발권 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입장이 관련 부처마다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경협차관 실무를 당당하고 있는 재경부는 "러시아에 제공한 차관의 조기 상환이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다"는 입장이다. 또 "차관 조건이 리보 +0.5%로 이미 이자 차익이 발생할 정도로 유리하다"며 "조기 상환을 요구할 경우 러시아에서 재차 차관의 일부 탕감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 한쪽에서는 3차 '불곰사업' 추진을 신중히 거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러시아로부터 무기 도입보다는 첨단 무기 기술 제공을 받고 싶어하지만 현물 상환이 불가피할 경우, 탐색 구조용 헬기와 상륙부대용 기동 헬기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러시아가 6월 현금 상환을 이행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경협차관에 대한 우리 정부 정책 수정에 대한 논의와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