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양자, 우주 등 핵심 신흥 기술에서 한국의 경쟁력이 주요국 중위권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평가 가중치가 높은 반도체(5위) 덕분에 종합 순위는 25국 중 5위로 집계됐지만, 총점은 1·2위인 미국·중국의 절반 이하로 낮았다. AI(9위)·바이오(10위)·양자(12위)·우주(13위) 등 분야별 순위도 최상위 국가들과 차이가 많이 났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공공정책대학원)의 과학·국제 문제 연구소 ‘벨퍼 센터’는 이런 결과를 담은 ‘핵심 신흥 기술’ 순위를 지난 5일 발표했다. 벨퍼 센터가 5대 핵심 신흥 기술 분야의 국가별 순위를 집계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韓, 최첨단 AI 기술 취약
이번 조사에서 종합 5위에 오른 한국의 총점은 20점으로, 1위 미국(84.3점)과 2위 중국(65.6점)에 한참 못 미쳤다. 벨퍼 센터는 종합 순위 집계에서 반도체 분야 비율을 35%로 가장 많이 반영했고, AI(25%)·바이오(20%)·우주(15%)·양자(5%) 순으로 가중치를 뒀다.
한국은 반도체 분야에선 미국, 중국, 일본, 대만에 이어 5위로 집계됐다. 설계와 제조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반면, 장비에서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AI 분야 순위는 독일, 영국, 프랑스, 인도 등에도 밀려 9위였다. 총점은 14.1점으로 1위 미국(90.8점)·2위 중국(58점)과 차이가 컸다. AI 순위는 자체 모델의 정확도, 데이터, 컴퓨팅 성능, 알고리즘, 인적 자원 등 8개 지표를 평가해 점수를 매겼는데 한국의 AI 모델 정확도 점수는 0점이었다. 한국은 자체 AI 모델이 없다고 본 미 스탠퍼드대의 ‘AI 인덱스 2024’가 이번 평가 근거로 사용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LG AI 연구원 관계자는 “스탠퍼드대 AI 인덱스 2025에는 LG AI연구원이 개발한 AI 모델 ‘엑사원 3.5’가 포함돼 있다”며 “최신 정보가 반영되지 않아 한국 순위가 더 낮게 나왔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알고리즘 지표 점수에서 한국이 0점을 받은 점이 뼈아프다고 보고 있다. AI 모델의 기틀이 되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구글, 오픈AI와 달리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알고리즘을 변용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벨퍼 센터는 “한국은 생성형 AI 분야의 기술 격차가 있는데 기업의 투자는 감소 추세이고, AI 인력도 부족하다”고 했다. 정부가 인공지능 기본법, 첨단산업 인재 혁신 특별법 등을 추진하며 AI 전문 인력 양성에 나섰지만, 해외 인력 유치는 물론이고 국내 인력을 붙잡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평가다. 이번 조사에서 AI 인재 지표의 한국 점수는 2.6점으로 미국(19.1점), 중국(20점), 유럽(17.6점)과 차이가 많이 났다.
◇“인재 부족 심각”
반도체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 분야에서 한국은 10위 안팎의 순위인 데다, 바로 뒤 순위 국가들과 점수 차이도 적어 향후 순위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과 중국 등 최상위 국가와 차이가 더 벌어지고, 후발 국가들에 역전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벨퍼 센터는 한국이 10위권에 머문 바이오, 양자, 우주 분야는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국제 협력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지난 정부가 ‘3대 게임 체인저’ 기술로 꼽은 AI, 바이오, 양자는 이번 정부에서도 투자와 지원이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벨퍼 센터는 한국의 전반적인 핵심 신흥 기술 경쟁력에 대해 “인구 감소와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학생들이 의학 분야로 진로를 선택하는 경향에 따른 인재 부족 문제의 영향이 심각하다”고 했다.
미국이 다섯 분야에서 모두 1위에 오른 가운데, 중국은 모두 2위로 미국을 추격했다. 벨퍼 센터는 “미국은 모든 부문에서 강력하지만 완전한 패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봤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력과 인재, 자원을 보유한 미국은 최근 지속적으로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지난해 발표한 ‘2024 네이처 인덱스’에서는 중국이 처음으로 미국을 누르고 종합 순위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네이처 인덱스는 세계 최상위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 수와 인용 횟수, 영향력 등을 바탕으로 집계되는 순위로, 상용화할 과학기술의 선행 지표로 꼽힌다. 중국이 핵심 신흥 기술에서도 미국을 따라잡을 날이 임박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 1월 중국은 ‘딥시크 쇼크’로 글로벌 AI 산업계를 놀라게 했다.
벨퍼 센터는 “중국은 여전히 미국을 뒤쫓으며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고, 여러 부문에서 격차를 좁히고 있다”며 “외국 장비에 대한 의존도, 취약한 초기 단계의 민간 연구, 얕은 자본 시장으로 인해 아직 반도체와 첨단 AI에서 뒤처져 있지만, 제약과 양자 통신 기술에서는 오히려 앞선다”고 했다. 또 “미국은 유럽, 일본, 한국과의 협력 파트너십을 통해 양자, 반도체, 바이오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미국이 중국을 따돌리려면 국제 협력이 필요하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