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그냥 읽기보다는 다음엔 좀 더 자연스럽게 아이컨택(눈맞춤)하면서 말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매주 월요일,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의 주간회의가 끝나면 다른 연구실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장면이 펼쳐진다. 외국인 박사과정 학생들이 한국인 학생의 영어 발표를 듣고 조언하는 시간이다. 문법과 발음은 물론이고, 단어 선택과 발표 방식까지 하나하나 짚는다.
지난달 13일 대전 IBS에서 만난 구본경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처음엔 영어로 발표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던 한국 학생들이 1~2년 지나면 국제학회에서 발표도 막힘없이 하고, 상도 받아온다”며 “영어 실력과 학문적 자신감이 동시에 자라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구 단장이 이끄는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은 국적과 언어가 다른 연구자들이 모인 국내 대표적인 ‘글로벌 랩(연구실)’이다. 그는 포스텍과 서울대를 거쳐 네덜란드 후브레흐트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대, 오스트리아 분자생명공학연구소(IMBA) 등 세계적 연구 기관에서 활동했다. 구 단장은 2021년 IBS에 합류하며 자신의 경험을 살려 본격적으로 다국적 인재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인도 출신의 프라즈왈 왈케(Prajwal Walke), 중국 출신의 청 멍웨이(Mengwei Cheng), 네덜란드 출신의 토마스 클롬프스트라(Thomas Maarten Klompstra)도 구 단장을 따라 박사과정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입을 모아 “영어 중심의 환경을 갖추고 있고, 실험 장비와 공간, 관리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며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다”고 말했다. 클롬프스트라 연구원은 “구 단장의 연구실은 한국에 있지만 유럽 연구실과 비슷하다”며 “문화적으로도 수평적이고, 소통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지원서, 비자 서류…아직도 종이만 받아”
그러나 연구실 밖으로 나서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외국인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건 ‘하드 카피(인쇄 문서)’ 행정의 벽이다.
인도 출신의 왈케 연구원은 구 단장 연구실에서 2022년 인턴으로 일하고 나서 박사과정까지 하고 싶었지만, 그때부터 문제가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이메일 제출은 안 된다고 해서 국제우편으로 서류를 보냈는데, 입학이 확정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추가 서류를 요구받았다”며 “지원 과정이 비효율적인 데다가, 외국인을 위한 별도 안내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때 지원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 우수한 학생들도 중간에 포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왈케 연구원은 “입학 확정 이후에 제출해도 될 서류를 처음부터 하드 카피로 요구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 모두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클롬프스트라 연구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2023년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비자 종류를 바꿔야 했는데, 같은 서류를 여러 번 온라인이 아니라 하드 카피로만 제출해야 했다”며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이라고 했다.
외국인 학생의 고충은 연구비 신청 단계에서도 반복됐다. IBS 내부에서는 영어 소통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외부 정부 연구비나 민간 재단 프로그램에 지원할 때는 얘기가 다르다. 왈케 연구원은 “공지사항, 규정, 신청 양식이 대부분 한국어로만 제공된다”며 “번역기를 써도 과학적 용어나 행정 표현은 이해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사이트가 있더라도 들어가 보면 한글로 된 파일로 연결되거나, 링크 자체가 깨져 있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중국 출신의 청 연구원 역시 “웹사이트는 영어 버전이 있지만, 거기서 파일을 다운로드하면 대부분 한글”이라며 “언어 장벽에 정보 접근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연구실 동료나 행정 직원의 도움 없이는 행정 절차를 제대로 밟기 어렵다는 점도 공통된 고민이었다.
◇“여전히 ‘손님’ 취급…정착 위한 뒷받침 필요”
외국인 박사과정생 세 명은 모두 한국에서 1~3년을 보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 청 연구원은 “한국 문화가 처음에 낯설었지만, 이제는 IBS 주변의 공원을 다니며 햇빛을 받는 시간을 즐길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클롬프스트라 연구원은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배달 음식은 정말 편하다”며 “한국은 참 살기 쉬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다만 아직 한국에서 계속 연구자로 살아갈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이들은 “졸업 이후의 경로가 잘 보이지 않는다”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다”고 했다. 2021년부터 꾸준히 해외 인턴 학생을 모집해 온 구 단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유럽은 박사과정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연구원, 교수로 이어지는 경로가 있고, 비자 체계도 이에 맞춰져 있다”며 “한국은 여전히 단기 체류자 중심이고, 행정 시스템은 외국인을 잠깐 머물다 가는 손님으로 취급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구 단장은 외국인 연구자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어 장벽을 넘어 행정, 주거, 문화, 비자까지 한 사람으로서 온전한 삶이 가능해야 한다”며 “한국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해줘야, 외국인 연구자도 한국도 성장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연구자들은 한국의 연구 환경이 충분히 경쟁력 있다고 했다. 더 많은 외국인 연구자가 한국을 선택하게 하려면 제도적 지원과 함께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했다. 청 연구원은 “한국의 연구 역량이 뛰어난데도, 외국인 연구자들이 몰리지 않는 건 ‘정보 부족’ 때문”이라며 “한국 과학계 전반에 걸쳐 더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은 이런 외국인 연구자의 의견을 반영해 자체 제작한 인턴십 안내 포스터를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적이 있다. 당시 포스터 하나에 3~4개월 동안 100건이 넘는 문의가 올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클롬프스트라 연구원은 “많은 외국인이 K-드라마나 K-팝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되지만, 연구에 대한 정보는 접근이 어렵고 덜 알려져 있다”며 “좋은 연구자들은 기회가 보이면 오게 되므로 그 기회를 보여주는 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