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바이오 기업 인텔리아 세러퓨틱스는 유전자 가위 기술을 활용한 유전자 치료제의 임상 1상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임상에 참여한 환자는 혈관 부종 발작이 현저히 줄자 “유전자 치료제는 내 삶을 바꾼 ‘마법 지팡이’”라며 감탄했다.
DNA 염기 서열을 정밀하게 잘라내거나 수정하는 유전자 가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희소·난치병 치료의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문서 작성기(워드프로세서)처럼 정교한 유전자 편집 기술로 꼽히는 ‘프라임 에디팅’이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는다.
◇더 정밀한 유전자 가위, 인간 첫 적용
미국 생명공학 기업 ‘프라임 메디신(Prime Medicine)’은 지난 19일 면역 세포 관련 질병을 앓는 10대 청소년에게 최신 유전자 가위 기술 ‘프라임 에디팅’을 적용한 임상 1상 결과를 발표했다. 프라임 에디팅을 인체에 적용한 세계 첫 사례다. 환자는 치료 한 달 후에도 심한 부작용을 보이지 않았고, 면역력이 회복되는 등 증세가 호전된 것으로 확인됐다.
일반적으로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기술은 책에서 잘못된 문장을 오려내고 다른 문장을 붙여서 고치는 것에 비유한다. 이에 비해 프라임 에디팅은 책의 한 문장에서 잘못된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고, 올바른 글자를 다시 쓰는 것에 빗댈 수 있다. 유전자 교정의 ‘워드 프로세서’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프라임 에디팅은 n카스9(카스9 니카제) 단백질, 역전사 효소, 프라임 에디팅 가이드(peg) RNA로 구성된다. n카스9은 사다리의 한쪽 줄만 조심스레 끊듯 DNA를 한 가닥만 자르고, peg RNA는 목표 DNA의 위치를 더 정확히 특정하는 역할을 한다. 목표 DNA의 양쪽 가닥을 모두 자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과 달리 한 가닥만 절단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에 프라임 메디신이 임상 시험한 약물(PM359)은 백혈구가 세균을 죽이지 못해 반복적인 감염을 겪는 ‘만성 육아종병(CGD)’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됐다. 이 병은 20만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선천성 면역 질환이다. 이번 약물은 유전자 돌연변이를 정확히 교정해 질병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랑스 파리 네커 병원의 유전자 치료 전문가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치료 효능을 확인하려면 6개월~1년은 걸릴 것”이라면서도 “프라임 에디팅 기술을 인체 임상에 적용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했다.
◇ 3세대 기술은 상용화... 초고가는 문제
4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로 부르는 프라임 에디팅이 임상 초기 단계인 데 비해, 3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로 꼽는 크리스퍼는 이미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다. 미국의 버텍스 파마슈티컬스와 스위스의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동 개발한 유전자 교정 치료제 ‘카스게비’는 낫 모양(겸상) 적혈구 빈혈증 치료제로 재작년 말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세계 최초 치료제다. 다만 높은 개발 비용 때문에 치료제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나온다. 버텍스의 카스게비는 1회 투약 비용이 무려 220만달러(약 30억원)에 달해 대다수 환자들이 엄두를 못 내는 수준이다.
프라임 에디팅 임상 1상에 성공한 프라임 메디신은 이번 결과를 발표하면서 치료제 자체 개발은 중단한다고 밝혔다. 프라임 에디팅 기술을 개발한 데이비드 리우 하버드대 박사가 세운 이 회사는 2021년 설립 당시 3억1500만 달러(약 4300억 원)를 유치했지만, 막대한 개발 비용을 투입한 탓에 지금은 회사 운영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자금난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우 교수는 “과학적으로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발전했지만, 희귀 질환 치료제 개발은 경제성이 낮아 상업적으로 지속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개인 맞춤형 유전자 치료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정인을 위한 유전자 치료제를 단기간에 개발해 정밀 의료를 실현한다는 목표다. 실제로 미국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과 펜실베이니아대 등 공동 연구진은 유전 질환을 앓는 생후 10개월 아기를 위한 크리스퍼 기술 기반 유전자 치료제를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지난 15일 국제 학술지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연구진은 체내 질소화합물을 없애지 못하는 질환을 타고난 아기를 유전자 치료로 회복시켰다. 영아기 사망률이 50%에 달하는 유전 질환을 앓는 아기가 단 세 차례 유전자 치료로 퇴원할 정도로 호전된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 치료제가 갈수록 다양하게 개발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시장 규모도 급증할 전망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30년까지 60종 이상 유전자 치료제가 승인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 규모는 2027년 198억8000만달러(약 27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