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접기는 영어로 ‘오리가미(origami)’라고 한다. 종이접기 공예가 발전한 일본어에서 딴 이름(おりがみ)으로, 일본어로 ‘접다(오리)’와 ‘종이(가미)’를 합친 말이다. 종이를 접어 골과 마루 구조를 만들어 원하는 입체로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어쩌면 자연을 모방한 기술이지 모른다. 식물의 싹을 보면 나중에 잎 표면의 골과 마루가 된 선들을 따라 차곡차곡 접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 고백을 위해 종이학을 접던 종이접기가 사람을 구하는 기술로 변신했다. 유전물질인 DNA를 원하는 모양으로 접어 난치병인 췌장암에 걸린 세포만 가려내고,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는 암 백신도 만든다. DNA를 접어 인체에 침입하는 바이러스 형태로 만들어 인체에 주입하면 면역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몸속을 돌아다니며 상처를 치료하는 의료용 로봇도 종이접기로 개발하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대 기계공학과의 한범수 교수(왼쪽)와 박사후 연구원인 최새로미 박사. 종이접는 원리를 이용한 DNA 오리가미로 난치성 췌장암 조직을 정밀하게 식별하는 데 성공했다./미 일리노이대

◇DNA로 원통 접어 암 조직에 주입

미국 일리노이대는 “기계공학과 한범수 교수 연구진이 DNA에 오리가미 기술을 적용해 췌장암에 걸린 조직과 정상 조직을 가려내는 데 성공했다”고 4월 22일 밝혔다. 퍼듀대 기계공학과 최종현 교수가 공동 교신저자로 등재된 연구 논문은 지난 2월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에 실렸다.

췌장암은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췌장에 생긴 암으로, 5년 생존율이 15.9%에 불과하다. 생존율이 이렇게 낮은 것은 췌장이 복부 깊숙이 있어 일반 종합검진에서 하는 내시경이나 초음파로는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기 발견이 쉽지 않아 말기 환자가 대부분이다.

연구진은 유전물질인 DNA 가닥을 연결하고 접어 원통과 타일 구조를 만들었다. DNA는 아데닌(A)·구아닌(G)·시토신(C)·티민(T)이라는 4가지 염기로 구성된다. 이 염기들이 배열된 순서에 따라 생명현상을 좌우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유전정보가 바로 염기서열인 것이다.

DNA는 두 가닥이 지퍼처럼 연결돼 이중나선을 이룬다. 이때 아데닌은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민과 결합한다. 염기가 배열된 순서를 잘 설계하면 이와 같은 염기의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DNA 가닥으로 원하는 입체 나노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종이를 접는 금을 DNA 가닥으로 생각하면 된다.

연구진은 이런 방식으로 DNA를 접어 다양한 크기의 원통과 타일 모양 구조물을 만들었다. 그 안에 형광을 내는 염료를 넣고 암 조직에 투여했다. 최종현 교수는 “췌장암에 걸리면 세포 성장과 발달에 관여하는 KRAS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다”며 “이런 암세포는 정상 세포와 달리 외부 액체방울을 삼키면서 DNA를 흡수한다”고 설명했다.

DNA 가닥에 염료(보라색)을 넣고 원통과 타일 모양으로 만든 모양. 특정 크기에서 췌장암 조직에 흡수되는 양이 가장 많았다./Advance Science

◇형광으로 암세포 정확히 구별, 약물도 전달

연구진은 DNA 구조물 안에 형광을 내는 염료를 넣었다. 췌장암 조직이 이런 DNA 구조물을 흡수하면 현미경 이미지에서 형광으로 환하게 빛난다. 이를 통해 암세포를 정상 세포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한 교수는 “DNA 종이접기를 이용하면 췌장암 조직을 보다 정확하게 식별해 절제 수술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실제로 췌장을 모방한 인체 조직으로 가능성을 입증했다. 먼저 췌장암 세포로 오가노이드(organoid)를 배양했다. 오가노이드는 인체의 모든 세포로 자라는 줄기세포를 장기(臟器)와 유사한 입체 구조로 배양한 것으로, 미니 장기라고 불린다. 암 오가노이드는 평면 접시에 배양한 암세포보다 실제 인체 상태를 더 잘 반영한다. 여기에 형광 염료를 담은 DNA 구조물을 주입했다.

형광 이미지를 확인한 결과, 길이 약 70㎚(나노미터, 1㎚는 10억분의 1m), 지름 30㎚의 원통 구조와 길이 6㎚, 폭 30㎚의 타일형 구조물이 췌장암 조직에 가장 많이 흡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변의 정상 조직에는 흡수되지 않았다. 한 교수는 “DNA 나노 구조물의 흡수에는 모양보다 크기가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며 “동일한 원통이라도 길어지거나 짧아지면 흡수 특성이 저하되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종이접기로 만든 DNA 구조물을 약물 전달체로도 쓸 수 있다고 기대했다. DNA 구조물에 염료 대신 약물을 넣고 암 조직에 흡수시키면 된다. 한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부작용 없이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항암제나 치료용 유전물질을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며 “현재 관련된 후속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서울대에서 석사학위까지 받고 2001년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퍼듀대 교수를 거쳐 2024년 일리노이대로 자리를 옮겼다. 공동 교신저자인 최종현 퍼듀대 교수는 연세대에서 석사학위까지 받고 2005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종이접기 오리가미 방식으로 DNA를 접어 에이즈 바이러스 구조를 만든 모습. 이를 이용하면 인체에 전혀 해를 주지 않고 백신 효과를 낼 수 있다./MIT

◇면역력 키우는 암 백신도 개발

종이접기로 만든 DNA 구조물은 암 백신으로도 개발되고 있다. 백신은 독성을 없앤 바이러스나 세균를 인체에 주입해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원리다. 마치 소수의 적군을 미리 경험하고 준비 태세를 갖춰 나중에 적이 오면 바로 공격하는 식이다. 암 백신은 항암제처럼 암세포를 직접 파괴하지 않고 이런 면역반응을 유도한다.

류주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의약소재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미국 다나파버 암연구소, 하버드 비스연구소와 함게 DNA 오리가미 기술을 활용한 암 백신 ‘도리백(DoriVac)’을 개발했다.

연구진은 종이접기 기술로 CpG를 DNA 나노 구조체 표면에 배치했다. CpG은 시토신(C)과 구아닌(G) 염기서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DNA에서 많이 발견된다.

세포 실험 결과 CpG들이 3.5㎚ 간격으로 배열될 때 암 면역 치료 효과가 가장 높았다. 피부암을 유도한 쥐 5마리에게 도리백을 주입한 결과 1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150일까지 생존했다. 반면 아무것도 주입하지 않은 쥐는 42일째 모두 사망했다.

백신에는 바이러스 껍질이나 바이러스 모양으로 만든 구조물도 쓰인다. 앞서 매사추세츠 공대(MIT) 연구진은 2020년 종이접기 기술로 DNA를 후천성면역결핍증 바이러스(HIV)와 유사한 구조로 접어서 인간 면역세포에서 강력한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데 성공했다.

DNA 오리가미는 2006년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의 폴 로스문트(Paul Rothemund) 박사가 처음 개발했다. 그는 종이를 접듯 DNA를 겹겹이 연결해 다양한 나노 구조물을 만들어냈다./Nature

DNA 오리가미는 2006년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의 폴 로스문트(Paul Rothemund) 박사가 처음 개발했다. 그는 네이처에 종이를 접듯 DNA를 겹겹이 연결해 만든 다양한 나노 구조물을 발표했다.

이 기술은 처음부터 세상을 바꿀 기술로 주목받았다. 이듬해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지(誌)는 2006년 미국에서 나온 나노기술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5대 연구성과를 선정 발표했는데, 그중 하나가 칼텍의 DNA 오리가미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DNA 오리가미가 실제 환자 치료에 갈 날이 다가오고 있다. 특히 한국 과학자들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김도년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 연구진은 2023년 네이처 표지논문으로 DNA 오리가미로 나노 구조물을 변형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방법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DNA 가닥으로 종이를 접을 금과 같은 와이어프레임(wireframe)을 만들었다. DNA 구조물에 이런 가닥을 넣으면 복잡한 구조를 만들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원하는 모양으로 변형할 수도 있다. 김 교수는 이런 DNA 오리가미 기술이 약물 전달을 위한 나노 로봇에 활용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참고 자료

Advanced Science(2025), DOI: https://doi.org/10.1002/advs.202410278

Nature Nanotechnology(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65-024-01615-3

Nature(2023),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3-06181-7

Nature Nanotechnology(2020), DOI: https://doi.org/10.1038/s41565-020-0719-0

Nature(2006), DOI: https://doi.org/10.1038/nature04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