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원자력 종주국인 미국에 연구용 원자로(연구로) 설계 기술을 수출한다. 1959년 미국의 지원으로 연구로를 도입해 원자력 기술의 첫발을 뗐던 한국이 66년 만에 미국에 역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연구로는 차세대 암 치료 의약품 생산 등에 쓰여 세계적으로 도입이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이 수출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열었다는 기대가 나온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7일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현대엔지니어링, 미국 MPR 컨소시엄이 미국 미주리 대학교와 출력 20MW(메가와트)급 신규 연구로 건설 사업의 초기 설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차세대 원전으로 주목받는 SMR(소형 모듈 원전)의 선두 미국 기업인 뉴스케일을 비롯해 6개 국제 컨소시엄을 제친 것이다.
이번 계약 규모는 1000만달러(약 142억원)이고, 설계 단계가 진행될수록 수출액이 늘어난다. 연구로 건설을 포함한 전체 사업 규모는 약 10억달러로 추정되며, 건설 계약 등은 차후에 선정된다.
이번 수출은 한국의 원자력 기술과 연구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평가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 수출이 원자력 산업 분야의 위상을 보여준 것이라면, 연구로 수출은 연구·개발(R&D) 분야의 위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번 계약은 미국 에너지부(DOE)의 민감 국가 지정에도 한미 양국의 과학기술 협력은 이상 없음을 보여주는 결과”라며 “향후 연구로 구축 과정에서 양국의 원자력 기술 교류가 크게 활성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로, 세계 10국만 개발… 수십조 수출 시장 물꼬 텄다
미국 미주리대는 현재 미국 대학 중 최대 규모인 10MW급 연구용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다. 이 연구로에서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인 ‘루테튬-177’이 생산되는데, 미국에서 유일하다. 이를 활용해 암세포에만 방사선을 내보내 암 조직을 파괴하는 치료제를 만드는 것이다. 미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전립선암 치료제 ‘플루빅토’가 대표적이다. 미주리대에 따르면, 이곳의 연구로에서 생산된 의료용 동위원소로 암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인원이 2023년 한 해 동안 160만명에 달했다. 이에 미주리대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20MW급 연구로의 국제 경쟁입찰을 발주했다. 이번에 한국 컨소시엄은 미국 뉴스케일, 아르헨티나 인밥 등 6개 컨소시엄과 경쟁해 계약을 따낸 것이다.
◇향후 수십조원 수출 시장 열릴 전망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현대엔지니어링, 미국 MPR 컨소시엄이 계약한 초기 설계는 원자로 본격 설계에 앞서 건설 부지 조건과 환경영향평가 등을 분석하는 단계다. 임인철 한국원자력연구원 부원장은 “약 6개월간 초기 설계를 수행한 뒤 추가 협의를 통해 개념 설계와 기본 설계 계약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이변이 없는 한 다음 단계까지 계약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로 설계와 핵연료 공급을, 현대엔지니어링은 종합 설계와 사업 관리 등을 맡는다.
과기정통부는 이번 기술 수출이 한국의 원자력 R&D 역량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고농축 핵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원자력연구원의 ‘고밀도 저농축 핵연료’ 기술을 핵심으로 꼽았다. 연구원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 기술은 핵연료의 농축도를 낮추면서도 촘촘하게 배치하는 식으로 원자로 성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핵무기로 악용될 수 있는 우라늄 농축을 막는 핵심 기술이다. 미 정부가 핵 비확산 정책을 강화하는 가운데, 이 같은 한국만의 기술이 계약 체결에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향후 연구용 원자로 수출에도 물꼬가 트일 전망이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세계 54국에서 연구로 227기가 운영되고 있는데, 이 중 161기가 40년 이상 된 노후 연구로다. 과기정통부는 향후 20년간 연구로 30~50기의 신설·대체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연구로 1기당 건설 비용이 2억~10억달러인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수십조원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또 연구로는 차세대 암 치료제는 물론이고 전력 반도체 소재 생산, 신소재 개발 등에 폭넓게 쓰여 세계적으로 수요가 확대되는 추세다. 이창윤 과기정통부 1차관은 "이번 계약은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연구로 수출 선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청신호"라며 "우리가 기술 우위에 있는 핵연료 공급, SMR 수출로 성과를 확산시킬 것"이라고 했다.
◇‘민감 국가’ 우려 덜어내
한편으로는 이번 기술 수출이 민감 국가 관련 우려를 일정 부분 불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지난 15일 미국 에너지부는 한국을 민감 국가 명단에 포함했다. 에너지부는 미국 원자력 연구의 산실로 꼽히는 아이다호 국립 연구소 등을 산하에 두고 있어, 한미 간 원자력 기술 협력에 지장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주한규 원자력연구원 원장은 “14일에 미 에너지부 산하 아르곤 연구소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민감 국가 지정 이후에 이번 수출 계약을 맺었는데 문제가 전혀 없었다”며 “국내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연구용 원자로
우라늄 등 핵연료를 핵분열시켜 의료·산업·과학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성자를 생산한다. 원전과 달리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다. 규모는 작지만 섬세한 기술력이 요구된다. 세계에서 연구용 원자로를 자력으로 설계·개발한 국가는 약 10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