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색을 TV에 그대로 옮길 수 없을까. 올해 노벨 화학상은 반도체 입자로 가전업체들의 꿈을 현실로 만든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들의 연구는 디스플레이는 물론, 빛을 이용하는 에너지, 의료 분야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4일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모운지 바웬디(Moungi Bawendi·62)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루이스 브루스(Louis E. Brus·80)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 알렉세이 에키모프(Alexey Ekimov·78) 전 미국 나노크리스탈 테크놀로지 연구원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디스플레이 핵심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양자점(量子點, quantum dots)을 발견하고 이를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QLED TV에서 자연의 색 구현
양자점은 QLED(양자점발광다이오드) TV에 들어가는 입자이다. 양자점은 수백~수천개의 원자로 이뤄진 나노미터(10억분의 1m) 단위의 결정체다. 일반 물질보다 발광(發光), 충전 능력이 월등해 차세대 디스플레이, 배터리 원료로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의 물리학자인 알렉세이 에키모프는 1981년 러시아 학술지에 양자점 원리를 처음 발표했다. 이후 미국 예일대의 마크 리드(Mark Reed) 교수가 처음으로 이를 양자점이라고 불렀다. 양자점은 절연체와 도체 사이의 반도체 성질을 나타내 외부에서 열이나 빛, 전기 자극을 주면 전자를 전달하거나 빛을 낸다. 이를 이용해 원하는 색을 내는 것이 바로 QLED TV이다.
양자점이 반도체 성질을 갖는 것은 전자 때문이다. 원자나 수십개 원자로 이뤄진 분자는 전자들이 마치 인공위성처럼 특정 궤도에 몰려있다. 이로 인해 에너지가 불연속적인 모습을 보인다. 입자의 에너지가 마치 덩어리처럼 존재한다고 양자화됐다고 말한다.
에너지가 양자화된 원자들이 모여 고체를 이루면 전자가 많은 궤도와 없는 궤도로 나뉜다. 둘 사이를 밴드갭(bandgap)이라고 한다. 유기물질은 밴드갭이 크기 때문에 절연체가 되지만, 금속은 밴드갭이 작아 도체가 된다. 그런데 원자가 수백~수천개 모인 나노입자인 양자점은 밴드갭이 그 중간쯤이어서 반도체가 된다.
브루스 교수와 에키모프 연구원은 양자점을 처음 발견했다. 루이스 브루스 교수는 벨 연구소 시절인 1980년대 초 용액에 입자들이 균일하게 퍼진 ‘콜로이드’ 상태의 양자점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버려진 시료라고 생각했지만, 용액 속에 있던 입자의 크기에 따라 색이 바뀌는 것을 발견했다. 양자점은 빛을 흡수한 다음 다른 파장으로 방출한다. 이때 색상은 입자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전자가 쓸 수 있는 공간이 달라 광학 특성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에키모프는 염화구리 입자의 크기를 다르게 하고 유리에 입히면 색이 달라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이 러시아어로 쓰여 서방 과학계는 이 발견을 알지 못했다. 브루스 교수와 에키모프 연구원은 각각 따로 양자점을 발견한 것이다. 에키모프가 양자점을 처음 발견한 시점은 브루스 교수보다 빠르지만, 양자점의 이론적인 정립과 실제 합성법에는 브루스 교수가 더 많은 영향을 줬다. 두 사람은 양자점을 발견한 공로로 2006년 미국광학학회가 주는 로버트 우드 상을 함께 받기도 했다.
◇대량 합성 가능해지면서 상용화 봇물
실제 양자점의 합성법을 찾은 건 브루스 교수의 제자인 바웬디 교수다. 그는 1993년 ‘미국화학회저널(JACS)’에 효율적인 반도체 양자점 합성법을 발표했다. 글로벌 학술정보업체인 클래리베이트는 지난 2020년 바웬디 교수와 펜실베이니아대의 크리스토퍼 머리(Christopher Murray) 교수,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IBS 나노입자연구단장)를 나노 입자를 정밀 합성한 연구 공로로 노벨 화학상 수상자 후보로 꼽았다. 그중 바웬디 교수만 실제로 노벨상 수상자가 됐다.
바웬디 교수는 양자점을 합성하는 ‘급속 주입 방법’을 개발했다. 유기금속 시약을 뜨거운 용매에 빠르게 주입해 양자점 합성에서 씨앗의 역할을 하는 ‘핵’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양자점이 뭉치는 것을 막는 비누와 같은 계면활성제를 넣어 균일한 크기로 만들었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의 연구가 “나노 기술의 중요한 씨앗을 심었다”고 평가했다. 브루스 교수의 제자이기도 한 류순민 포스텍 화학과 교수도 “나노과학이라는 말의 출발점이 바로 양자점 연구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라며 “1980년대 출발한 나노 과학의 학문적인 확장과 성장이 이분들의 연구에서 시작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바웬디 교수의 제자인 김상욱 아주대 응용화학생명공학과 교수는 “양자점이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실제 상업적인 활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일 것”이라며 “삼성전자의 제품에 양자점이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클래리베이트가 노벨상 후보로 꼽았을 때 현택환 교수도 “내 연구가 어디에 쓰이는지 물어보면 삼성 QLED TV를 보라고 말한다”고 했다.
현택환 교수는 2001년 온도를 서서히 올리며 화학 반응을 시키는 방법으로 균일한 크기의 나노 입자 합성에 성공했다. 현 교수의 연구를 계기로 다양한 크기의 양자점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상용화 속도도 빨라졌다. 노벨상은 3명만 받을 수 있다. 이번에 초기 이론 개발자 2명과 첫 합성자 1명아 수상하면서 아쉽게도 현 교수는 수상하지 못했다.
양자점은 현재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태양전지, 암 진단, 치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 활용된다. 양자점이 빛을 받아 전자를 내면 전지가 되고, 빛으로 인체 내부를 밝히면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또 환부에서 열을 내면 치료도 할 수 있다. 양자점이 입자이므로 휘어지는 기판에 붙이면 유연한 전자장치를 만들 수 있다. 노벨위원회는 “얇은 태양전지도 구현하고 양자통신에도 쓰일 수 있다”며 “이제 막 이 작은 입자의 잠재력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참고 자료
JETP Letters(1981), https://web.archive.org/web/20141216142832/http://www.jetpletters.ac.ru/ps/1030/article_15644.pdf
The Journal of Chemical Physics(1984), DOI: https://doi.org/10.1063/1.447218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1993), DOI: https://doi.org/10.1021/ja00072a025. ISSN 0002-7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