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처럼 생긴 대형 초식 동물이 멸종하면서 당시 열대 식물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대형 동물이 사라지자 생태계에서 공존하던 식물마저 씨앗을 퍼뜨리지 못해 멸종의 길을 걸었다는 말이다.
칠레 오히긴스대학이 주축이 된 국제 공동 연구진은 마스토돈 화석 이빨 96개를 다중 분석 기법으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지난 13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Nature Ecology & Evolution)’에 발표했다.
코끼리의 먼 친척인 마스토돈은 약 1만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끼리처럼 긴 엄니를 가졌으며, 북미와 중미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화석이 발굴되고 있다.
연구팀은 칠레 남부 로스빌로스에서 칠로에 섬까지 약 1500㎞에 걸쳐서 수집된 마스토돈 화석 이빨 96개를 확보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플라이스토세 동물 화석이 다수 발견된 유적지 ‘타구아타구아 호수’에서 출토됐다.
연구팀은 한 가설에 주목했다. 생물학자 다니엘 얀젠과 고생물학자 폴 마틴은 1982년 열대 식물의 커다란 열매는 마스토돈 같은 거대 동물을 유인해서 씨앗을 퍼뜨리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40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마스토돈의 화석 이빨을 활용했다. 동위원소 분석과 미세 치아 마모 분석, 치석 잔류물 분석 등을 통해 1만년 전 마스토돈의 식생활을 재구성했다. 그 결과 커다란 열매를 맺는 열대 식물이 실제로 확인됐다.
연구에 참여한 고식이학자인 플로랑 리발 박사는 “마스토돈의 화석 이빨에서 칠레야자 같은 과일의 전분과 조직 잔해가 확인됐다”며 “이는 마스토돈이 실제로 이런 열매를 자주 먹었고, 숲 생태계 재생에 기여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마스토돈이 먼 거리를 이동하며 열대 식물의 씨앗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마스토돈 같은 대형 동물이 멸종한 이후 이 역할을 대신할 종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마스토돈의 멸종이 수천 년간 지속된 열대 식물과 거대 동물의 공진화 관계를 끊었다고 봤다. 연구팀이 인공지능(AI)으로 남미 각 지역에서 마스토돈 같은 거대 동물에 의존했던 식물들의 보전 상태를 분석한 결과, 칠레 중부에서는 이런 식물의 40%가 멸종 위기 상태로 나타났다. 거대 동물에 의존하지 않은 다른 식물들에 비해 4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거대 동물에 의존하던 열대 식물 중에는 고모르테가(Gomortega keule), 칠레야자, 칠레 소나무(Araucaria araucana) 같은 일부 종만 살아남은 상태다. 연구에 참여한 안드레아 로아이사 박사는 “동물과 식물 간 생태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지역에선, 그 결과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참고 자료
Nature Ecology & Evolution(2025), DOI : https://doi.org/10.1038/s41559-025-02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