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보건당국이 위고비·마운자로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계열 비만 치료제를 가임기 여성과 임신부, 수유 산모에게 주의가 필요한 약물로 지목했다.
가임기 여성이 GLP-1 비만약을 먹고 경구 피임약 효과가 떨어져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는 사례가 다수 나온 데다, 임신이나 수유 중에 투약하면 태아·영아 건강에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의약품규제청(MHRA)은 지난 6일(현지 시각) GLP-1 계열 비만약을 복용하는 가임기 여성에게 기존 경구용 피임약보다 더 강력한 피임법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또 임신 중이거나 임신을 계획 중인 여성, 수유 중인 산모에게는 복용을 피하라고 공식 발표했다.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 미국 일라이 릴리의 마운자로는 식후 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GLP-1을 모방한 약물로,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혈당을 높이는 글루카곤은 억제해 포만감을 높인다. 식욕을 줄여 체중 감량 효과를 내는 방식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구토·설사와 함께 위 배출 지연이 대표적인 예이다. 위 안에 있는 음식물이 십이지장으로 배출되는 능력이 떨어져 장시간 음식물이 위에 잔류하는 현상으로 헛배 부름, 체기 등의 증상을 보인다.
영국 보건당국은 이러한 소화 지연이 경구 피임약의 흡수를 방해해 피임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구 피임약은 주로 소장에서 일정한 시간 내에 흡수돼야 안정적인 피임 효과를 내는데, GLP-1 약물이 위에서 음식물과 약물이 머무는 시간을 늘려 흡수를 지연시키고, 이 과정에서 흡수율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비만으로 인해 배란이 억제됐던 여성 환자가 GLP-1 약물 사용으로 체중이 줄면서 자연 배란이 회복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최근 영국에서는 GLP-1 투약 치료를 한 여성들이 경구 피임약을 함께 복용했음에도 잇따라 임신한 사례가 보고됐다.
보건당국은 경구 피임약 외에 피임 임플란트 시술이나 자궁 내 피임 장치(IUD) 등 비경구적 피임법을 함께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비만약 투약 중단한 직후 바로 임신을 시도하는 것도 주의가 필요하다. 영국 보건당국은 위고비는 투약 중단 후 2개월, 마운자로는 1개월간 피임을 유지하고 그 뒤에 임신을 시도하라고 권장했다. GLP-1 계열 비만약 성분이 동물실험에서 태아 성장 지연, 해부학적 기형 등을 유발한 사례가 보고됐기 때문이다.
다만 인체 대상 임상시험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나 임신부가 참여하지 않아 실제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안전성에 대한 데이터는 아직 부족하다.
캐롤라인 오바디아(Caroline Ovadia) 영국 에든버러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는 사이언스 미디어 센터에 “GLP-1 약물은 체중 감량과 대사질환 개선을 통해 임신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임신 중 복용의 안전성에 대한 데이터는 매우 제한적”이라며 “복용 전 피임 계획은 반드시 필요하고, 복용 중 임신이 확인되면 즉시 약물을 중단한 뒤 산부인과 전문의와 상담하고 초기 정밀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밀했다.
찬나 자야세나(Channa Jayasena)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CL) 교수도 “비만은 여성의 생식력을 감소시키지만, GLP-1 약물로 체중이 줄면 생식력이 개선돼 체중 감량 전보다 임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당국의 최근 지침은 여성이 GLP-1 약물을 복용 할 때 원치 않은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는 이런 구체적인 지침은 없지만, 전문가들은 임신 중이거나 수유 중인 여성에게 GLP-1을 비롯한 비만약을 복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김양현 고대안암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GLP-1뿐 아니라 모든 비만약 사용을 주의해야 한다”며 “꼭 써야 하는 경우라면 그 기간에는 철저한 피임 조치를 취하거나, 위고비·마운자로처럼 일주일 단위로 투여하는 약물보다 매일 복용해 감량 목표치에 빨리 도달하는 방법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임신을 하려면 영국 당국의 지침처럼 비만약 사용 후 최소 한 달 후에 시도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