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고영일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혈액암은 환자 수가 적고 관심은 낮지만, 최근 재발률을 절반가량 낮추는 등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하고 있다"며 "3단계 치료법을 통해 완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서울대병원

“혈액암은 다른 고형암보다 치료가 어렵지만, 완치는 물론 병원에서 완전히 졸업할 수도 있습니다. 좌절하지 말고 의료진과 끝까지 함께 하길 바랍니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만난 고영일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혈액암은 환자 수가 적고 관심은 낮지만 분명 치료법이 발전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고 교수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수련의, 내과 전공의를 거쳐 2013년부터 혈액종양내과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

혈액암은 성장 속도가 빠른 혈액세포에 생기는 암이다. 백혈병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혈액 또는 골수 속 백혈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면서 발생한다. 급성과 만성으로 나뉘는데, 그중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ALL)은 성인에 발생하면 진행 속도가 빠르고 치명적이다. 암이 빠르게 퍼져 초기·말기처럼 기수를 나누기도 어렵다. 발병 후 3개월 안에 치료하지 않으면 급격히 악화돼 사망할 수 있다.

고 교수는 “소아 ALL 환자는 완치율이 높은 반면, 성인은 과거엔 30% 정도만 완치됐다”며 “치료를 미루면 수주 안에 병세가 나빠질 수 있는 만큼 신속한 치료가 필수”라고 말했다. 국내 환자는 연 300명 정도로 드물다. 연간 발생 건수가 전체 암의 0.4% 미만이다.

장기에 생긴 고형암은 수술도 하지만, 혈액암은 주로 항암제로 치료할 수 있다. 대표적인 치료법은 3단계 화학요법이다. 첫 단계는 암세포를 100분의 1 수준으로 줄이는 ‘유도 요법’, 다음은 암세포 크기를 줄여 거의 사라진 상태를 만드는 ‘공고 요법’, 마지막은 2~3년에 걸쳐 재발을 막는 ‘유지 요법’이다.

과거에는 재발을 막기 위해 조혈모세포(골수) 이식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공여자 부족으로 선택지가 제한되고 있다. 고 교수는 “형제가 많은 과거와 달리 현재는 공여자 찾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며 “이식이 치료법의 전부가 될 수 없는 시대”라고 말했다.

백혈병은 치료 후 암세포가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절반 이상이 5년 안에 재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중항체, 항체약물접합체(ADC) 등 표적치료제가 등장하면서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 치료에 새 길이 열렸다. 특히 이중항체 치료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소량 남아 있는 암세포까지 찾아 없앤다.

실제로 암세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어든 성인 환자에게도 이중항체 치료제를 사용하면, 재발 위험을 절반 가까이 낮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올 2월부터는 암세포가 극소량 남아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중항체 치료제를 쓸 수 있게 됐다. 고 교수는 “이전보다 환자를 절반 가까이 살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고 교수는 환자 치료 외에 혈액암 정복을 위한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같은 암이라도 환자마다 유전자 돌연변이가 다르다”며 “이를 분석해 개인별 맞춤 치료 방향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한국인 급성 골수성 백혈병(AML) 환자의 유전자 변이 지도를 구축했고, 지난해 말에는 표적치료제 효과를 미리 예측하는 선별법을 개발해 발표했다. 기존 치료제가 특정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었던 한계를 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 교수는 지난 2017년 노보메디슨을 창업해 혈액암 신약 개발에도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한미약품(128940)으로부터 혈액암 신약 후보물질 ‘포셀티닙’을 도입해 임상 2상 시험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초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전체 암종을 대상으로 60세 이상 고령층에서 암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기 위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고 교수는 노화와 암의 연결 고리를 푸는 것이 앞으로 암 정복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고 교수는 “혈액암은 치료제 개발이 더딘 편이지만,다른 암종에 혁신 치료제 개발을 돕는 ‘모델 암종’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혈액암은 암세포가 혈액 속에 있어 쉽게 채취할 수 있고, 고형암보다 세포 구성이 균일해 유전자 연구에 유리하다”며 “이중항체, ADC, CAR(키메라 항원 수용체)-T세포 등 차세대 치료제 혁신도 혈액암에서 시작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