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ChatGPT DALL·E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과 함께 식품의약국(FDA) 인력 감축으로 인허가 심사 지연 우려가 계속되자 기술 거래가 활발해지고 있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들이 자체 개발보다 후기 임상시험 단계의 신약 후보물질을 도입하거나, 기업을 아예 인수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29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5월까지 글로벌 상위 제약사 20곳 가운데 기술 거래에 10억달러(한화 1조원) 이상 쓴 기업들의 공개된 거래 규모만 합쳐도 60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모든 글로벌 기업의 기술 거래는 총 1500억달러(206조원)였다. 5개월 계약 규모가 수치상 지난해와 비슷해 보이지만, 상위 20개사가 체결한 대형 계약 중 공개된 건만 추린 것이어서 시장에서는 훨씬 더 많은 거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20조원 계약에서 시작, M&A도 잇따라

상위 20개사가 도입한 기술은 대부분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희소질환과 암·중추신경계 질환에 집중됐다. 인허가 지연 위험을 피해 FDA 신속 심사·허가 대상인 패스트트랙 또는 희소의약품 지정 혜택을 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첫 대형 기술 거래는 수년째 글로벌 매출 1위를 지키고 있는 미국 존슨앤드존슨(J&J)에서 시작됐다. 지난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JPM 2025)에서 J&J는 미국 인트라셀룰러 테라퓨틱스의 조현병·양극성 우울증 치료제 ‘카플리타(성분명 루마테페론)’를 146억달러(한화 20조6000억원)에 도입한다고 발표해 이목을 끌었다.

J&J는 주력 제품인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스텔라라(우스테키누맙)’의 주요 특허가 지난해 만료돼 시장에서의 독점권을 잃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던 회사는 ‘넥스트 스텔라라’로 중추신경계(CNS) 치료제를 택했다.

카플리타는 이미 FDA 승인을 받았고, 주요 우울장애 병용요법으로도 추가 승인을 앞두고 있어 상업적 잠재력이 높다. 실제로 카플리타 매출은 지난해 4억8000만달러(6600억원)를 기록했다. J&J는 FDA 추가 승인까지 받으면 연간 최대 매출이 50억달러(6조9000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래픽=정서희

미국 일라이 릴리도 JPM에서 미국 스콜피온 테라퓨틱스가 유방암·진행성 고형암 환자 대상으로 임상 중인 신약 후보물질을 총 25억달러(3조6000억원)에 도입한다고 밝혔다.

유망 기술을 보유한 바이오 기업을 아예 사들이는 인수합병(M&A)사례도 있었다. 독일 머크는 미국 중증 희소질환·암 치료제 개발사 스프링웍스를 39억달러(5조6000억원)에 인수했다. 스위스 노바티스는 미국 심혈관 치료제 개발사 안토스 테라퓨틱스를 31억달러(4조원)에,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위장관암을 비롯한 희소암 치료제를 개발하는 미국 IDRx를 11억5000만달러(1조7000억원)에 각각 인수했다.

공동 개발 형태의 계약도 이어졌다. 스위스 로슈는 덴마크 질랜드파마와 13억달러(1조9500억원) 규모 계약을 체결해 차세대 비만 치료제 공동 개발에 나섰다. 이밖에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프랑스 사노피, 미국 화이자도 희소질환과 면역항암제 등 분야에서 공격적인 투자 행보를 보였다.

◇불확실성에 기술 도입 러시…국내사도 반사이익

글로벌 빅파마가 노리는 기술은 대부분 중증 희소질환과 암 치료 신약 후보물질에 쏠려 있다. 미국 내 약가 인하 정책, 의약품 관세 부과 가능성, FDA 인력 감축으로 인한 인허가 심사 지연 등 불확실성이 커지자, 리스크가 낮고 승인 가능성이 높은 신약 후보물질을 외부에서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FDA로부터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으면 신속 심사, 2상 후 조건부 승인, 수수료 면제, 연구개발(R&D) 자금 지원, 최대 10년간 시장 독점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빅파마는 1상에서 효능·안전성이 확인된 물질을 도입해 후속 임상과 인허가 노하우를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항암제 신약 역시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경우가 많아 허가 가능성이 높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정책 변화로 불확실성과 FDA 심사 지연 우려가 커졌고, 실제로 올해 FDA 승인 건수가 부진한 상황에서 빅파마들이 이런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기술 이전 계약과 M&A 가능성이 커져 국내 바이오 기업에도 기회”라고 말했다.

실제로 알테오젠(196170), 에이비엘바이오(298380), 알지노믹스 등 국내 바이오 기업이 올해 각각 빅파마와 대규모 기술 수출 계약을 맺었다. 황주리 한국바이오협회 교류협력본부장도 “글로벌 제약사들이 자체 개발보다 기술 도입에 무게를 두는 현재 흐름은 IPO(기업공개)나 유상증자 외에는 자금 조달 선택지가 적은 국내 바이오 기업에 분명한 기회”라고 말했다.

윤나리 지아이이노베이션(358570) 전무(임상중개전략부문장)는 “국내 기업들은 여러 기술을 넓게 펼치기보다 하나의 핵심 플랫폼이나 단일 파이프라인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며 “빅파마는 기술을 쇼핑하듯 여럿을 고르지 않고 자신들의 전략에 정확히 부합하는 하나를 찾는 만큼, 오히려 독자 기술 하나를 제대로 구축한 국내 바이오 기업에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바이오 기업은 단순한 자금 확보를 넘어, 빅파마와의 협업으로 신약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 국내 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해외 빅파마와의 기술 거래나 개발 협력은 자금 조달은 물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며 “여기에 우리가 어려운 임상시험 설계와 규제 대응, 상용화 전략 등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