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5년 5월 15일 오후 5시 17분 조선비즈RM리포트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정부가 의료용 대마(大麻) 성분의 뇌전증 치료제인 ‘에피디올렉스(Epidiolex)’에 대해 건강보험 급여 문턱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2가지 희소 난치성 뇌전증 질환으로 제한했던 급여 대상 질환을 3가지로 늘리고, 기존 뇌전증 치료제를 일정 수 이상 써야만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다로운 요건을 완화하는 게 골자다.
15일 의료계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으로부터 의료용 대마 치료제인 에피디올렉스의 급여 기준 개편안을 보고받고 검토에 착수했다. 앞서 지난달 심평원은 전문가 자문회의를 열고 급여 기준 변경안을 마련했다. 복지부는 논의를 거쳐 최종 변경안을 고시할 예정이다.
에피디올렉스는 영국 제약사인 GW파마슈티컬스가 대마의 꽃·잎에서 추출하는 칸나비디올(CBD) 성분으로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다. CBD는 중독성 없이 통증을 완화하고 과도한 흥분을 억제하는 효과는 물론, 뇌에서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가바(GABA) 수용체 기능을 높여 발작을 줄인다.
에피디올렉스는 2018년 CBD 약물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임상시험 결과, 에피디올렉스는 소아 희소 난치성 뇌전증인 ‘드라벳 증후군’과 ‘레녹스-가스토 증후군’ 환자들의 발작 빈도를 50% 이상 줄였다. FDA는 2021년 환자 수가 가장 많은 ‘결절경화증’에 대해서도 사용을 승인했다.
에피디올렉스는 2019년 국내에도 허가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에피디올렉스를 드라벳 증후군, 레녹스-가스토 증후군, 결절성 경화증 등 희소·난치성 뇌전증 환자에 한해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약을 수입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보험 혜택을 받는 환자는 극히 일부다. 급여 인정 기준이 까다로워 환자와 보호자들 사이에선 현실적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에피디올렉스는 1병당 약값이 120만원 이상으로 한 달에만 300만원에 넘게 든다. 이에 정부는 환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21년부터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해, 1병당 약 20만원으로 부담을 크게 낮췄다.
심평원은 에피디올렉스가 허가받은 세 가지 질환 중 드라벳 증후군과 레녹스-가스토 증후군만 급여 대상으로 지정했다. 두 질환은 전체 뇌전증 환자의 10% 미만에 불과하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결절성 경화증은 여전히 비급여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결절성 경화증은 유전성 희소 질환으로 간질성 발작 등 신경계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급여 장벽은 하나 더 있다. 급여 대상이 되려면 환자는 기존 뇌전증 치료제 11종 가운데 5종 이상을 사용했음에도 발작 빈도가 50% 이상 감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보호자들은 “독한 약을 5개나 써보는 데만 수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부작용으로 아이가 견디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최근 심평원 자문회의에서 신경과 전문의와 뇌전증학회 등 전문가들은 관련 규제를 완화해 더 많은 환자가 혜택을 보게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대상 질환을 결절성 경화증을 포함해 허가받은 3가지 질환 모두로 확대하고, 기존 약이 들지 않는다는 입증 기준도 드라벳·레녹스-가스토 증후군에 대해서는 5종에서 3종으로 줄이는 데 합의한 것이다. 이번에 새로 추가하는 결절성 경화증의 기존 약이 들지 않는다는 입증 기준은 5종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변경안을 반겼다.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 명예회장(강남베드로병원 신경과 원장)은 “에피디올렉스는 뇌전증 환자들의 발작 증상을 크게 줄여주는 효과가 검증된 약”이라며 “이번 변경안이 그대로 적용되면 혜택을 받을 환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홍 회장은 최근 악화하고 있는 국내 건강보험 재정 여건을 우려했다. 그는 “CBD 국산화를 통해 건보·국민 부담을 줄여, 보다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근본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뇌전증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6500만명, 국내에는 50만명에 달한다. 뇌전증 발작이 반복되면 뇌에 염증이 생기고 신경세포가 손상되는데, CBD는 항염증 효과가 있어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의료용 대마는 환각·중독을 일으키는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HC) 성분을 0.3% 미만으로 떨어뜨리는 정제 과정을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