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된 지 40년 이상 된 중견 전통 제약사들이 잇따라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고 있다. 수십 년간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경영을 해왔으나 성장 한계에 직면하면서 해외로 진출하고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상장을 추진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12일 국내 제약업계에 따르면 명인제약·익수제약·마더스제약·삼익제약 등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국내 중견 제약사들이 상장 주관사를 선정하고 한국거래소에 예비 심사를 제출하는 등 본격적인 상장 준비에 나섰다.
최근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은 회사는 명인제약이다. 종근당(185750) 영업사원 출신인 이행명 회장이 1985년 창업한 이 회사는 잇몸질환 치료제 ‘이가탄’, 변비 치료제 ‘메이킨’ 등 일반의약품을 앞세워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연 매출 2000억원대, 영업이익률 30%대 수준의 안정적 수익 구조를 갖춘 중견 제약사이다. 지난해에도 매출 2694억원, 영업이익 928억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올렸다.
명인제약의 주력 제품은 사실 이가탄·메이킨 같은 일반의약품이 아니라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이다. 우수 의약품 제조·품질 관리 기준(cGMP) 생산 시설에서 치매와 파킨슨병 등 중추신경계(CNS) 질환 치료제를 주로 생산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매출이 전체의 80%에 달한다.
명인제약이 IPO에 나선 주된 이유는 연구개발(R&D) 비용 확보다. 현재 명인제약은 신약 개발과 제품군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2021년 이스라엘 바이오벤처인 파마투비(P2B)에 620만달러(한화 86억원)를 투자하고 미국·캐나다에서 임상 3상 시험을 마친 파킨슨병 신약 ‘P2B001’의 국내 독점 판매·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지난해에는 이탈리아 중추·말초 신경계 치료제 개발사인 뉴론(Newron)과 치료 저항성 조현병(TRS) 치료제 ‘이베나마이드’의 국내 독점 계약을 맺었다. 명인제약은 이베나마이드의 글로벌 임상 3상 시험에서 국내 임상을 맡았다. 전체 환자 중 10%를 한국에서 모집하며, 이에 대한 임상 비용을 자체 부담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전체 임상시험 비용의 일정 비율을 분담하게 돼 R&D 자금 확보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번 IPO 추진 배경이 승계 목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재 77세인 이 회장은 지분 95.3%를 보유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승계 작업이 이뤄진다면 상속할 주식 가치가 5000억원이 넘는데, 세율 50%에 할증과세가 붙어 상속·증여세율은 최대 60%(최대 주주 할증과세 적용)로 늘어난다.
업계 일각에선 이 회장이 할증 과세에 따른 상속세 부담을 줄이고자 상장 후 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평가 받으려는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과도하게 높게 평가돼 있는 기업가치(약 7000억원 규모)를 IPO를 통해 낮추려는 계산이 깔렸다는 것이다. 회사는 지난달 30일 한국거래소에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했으며, 오는 7월 코스피 입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해온 중견 제약사들이 최근 세대 교체와 신사업 진출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특히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자 신약 파이프라인 확대와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대규모 자금 수요가 늘면서 IPO를 자금 조달 수단으로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1973년 설립한 삼익제약도 오는 10월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준비 절차에 돌입했다. 멀미약 ‘노보민시럽’ ‘소보민시럽’, 해열진통소염제 ‘마파람과립’ 등 일반의약품으로 지난해 매출 545억원, 영업이익 35억원으로 창립 이래 최대 실적을 냈다. 최근 천연물의약품 기반의 대상포진 후 신경통(PHN) 치료제 ‘SIKD1977’의 임상 2상을 진행 중이다. IPO를 통해 SIKD1977 후기 임상시험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1969년 창립 이후 55년간 우황청심원과 공진단 제품으로 성장해 온 익수제약도 3년 내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제시했다. 지난해 우황청심원 시장에서 판매 수량 기준으로 익수제약의 ‘용표 우황청심원’이 광동제약(009290)의 ‘광동 우황청심원’을 제치며 점유율 1위에 올랐고, 연 매출은 374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익수제약도 최근 천연물 기반 신약개발과 건강기능식품, 전문의약품 등으로 제품군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2011년 아남제약을 인수하며 제약업에 진출한 마더스제약도 IPO 대열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의약품 위탁생산(CMO)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2015년 자체 연구소를 설립하고 신약 개발에 집중해 왔다. 고지혈증 치료제 ‘로수엠젯정’, 당뇨병 치료제 ‘테네글립정’ 등이 이 회사가 출시한 복제약(제네릭)이다. 회사는 현재 건성 황반변성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 1상에 진입한 상태다. IPO를 통해 향후 인수합병(M&A)이나 외부 기술을 도입해 항체약물접합체(ADC)를 비롯한 항암 신약후보물질 군 구축 계획도 내놨다.
서근희 삼성증권 연구원은 “전통 중견 제약사들이 현재까지 안정적인 실적으로 성장해 온 것은 맞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을 뿐더러 국내 시장에서 계속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이에 시대 변화에 맞게 기업 체질을 개선해 해외 진출을 노리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중견 제약사들이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바이오 회사와 M&A하거나 기술을 도입하려는 시도도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