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직접 써보고,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플랫폼을 만듭니다. 앞으로 AI 신약개발 생태계를 조성해, 약대생부터 연구기관, 제약사까지 모두 경쟁력을 높이는 게 꿈입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히츠(HITS) 본사에서 만난 김우연 대표는 최근 출시한 신약개발 AI인 ‘하이퍼랩(HyperLab) 2.0’을 이같이 소개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교수인 김 대표는 2020년 5월 AI 신약개발 스타트업인 히츠를 창업했다. 현재 한국제약바이오협회의 AI신약개발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히츠는 지난해 하이퍼랩을 처음 선보인 데 이어, 지난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국제신약개발학회 DDC(Drug Discovery Chemistry) 2025에서 2.0 버전을 공개했다. 하이퍼랩은 생성형 AI를 기반으로 약물을 설계하는 플랫폼이다. 신약 개발 초기 단계에서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히츠는 국내 여러 AI 신약개발 기업 중 드물게 AI 플랫폼을 전 세계 기관·기업 또는 개인이 활용할 수 있도록 유료 구독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다. 김 대표는 “국내외 AI 신약개발 회사 중에 플랫폼을 모두가 쓸 수 있게 공개하는 곳은 별로 없을 것”이라며 “우리 기술로 후보물질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을 수 있다고 홍보하려면, 실체를 보여주고 경험하게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암 치료 전문병원인 미국 텍사스대 MD앤더슨 암센터는 하이퍼랩의 대표적인 구독자다. 이곳은 한 해 수백개의 신약 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난해 DDC에서 하이퍼랩을 접한 뒤 자체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직접 구독했다고 한다.
약효를 나타내는 최소 농도의 단위를 ‘몰(M)’이라고 부른다. 신약 개발 초기 단계에서는 100만분의 1몰인 마이크로몰, 10억분의 1몰인 나노몰처럼 아주 적은 양으로도 약효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핵심이다.
미국 MD앤더슨 암센터는 지난 5년 동안 이처럼 극소량으로도 암세포에 반응하는 물질을 찾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히츠의 하이퍼랩을 활용하자, 기존보다 수백 배 낮은 농도인 60나노몰 수준에서도 효과가 있는 새로운 후보물질을 설계해냈다. 5년 넘게 풀지 못한 문제를 단 6개월 만에 해결한 셈이다.
다만 하이퍼랩 1.0 버전은 신약 후보물질을 가상으로 찾아보고 컴퓨터로 미리 예측하는 단계에 머물렀다. 새로운 분자 구조를 설계한 뒤, 이 물질이 몸속 단백질과 얼마나 잘 결합하는지, 몸 안에서 안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시뮬레이션(가상실험)하는 식이다. 실제로 물질을 만들어 효능을 실험해보는 과정은 어림도 없었다.
히츠는 이후 1년 반 만에 AI 플랫폼의 기능과 범위를 대폭 확장한 상위 버전 ‘하이퍼랩 2.0′을 개발했다. 단순히 가상으로 예측하는 것을 넘어, 후보물질을 실제 화합물로 합성하고 실험까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고객사는 하이퍼랩 하나만으로 후보물질 발굴·설계부터 실제 합성을 통한 효능 검증까지, 신약 개발 전 과정을 원스톱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하이퍼랩이 단기간에 진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올 초부터 협업을 시작한 스위스의 분자 합성 전문기업인 신플켐(Symple Chem)의 역할이 컸다. 히츠가 AI로 설계한 후보물질과 합성 견적서를 보내면, 신플켐이 실제로 물질을 합성해주는 방식이다.
김 대표는 “하이퍼랩 2.0은 디지털 또는 버추얼(가상) 실험실에서만 이뤄지던 AI 신약개발을, 현실의 실험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구현했다”고 말했다. 회사는 합성된 물질을 실제로 고객에게 배송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히츠는 신약 후보물질로 활용할 수 있는 화합물 후보군도 대폭 늘렸다. 기존에는 약 7조개의 화합물이었지만, 지금은 세계 최대 수준인 11조개로 늘어났다. 이는 지난해부터 협력해온 미국의 화합물 합성 전문기업인 e몰리큘스(eMolecules)가 보유한 방대한 분자 라이브러리(데이터베이스) 덕분이다.
하이퍼랩 2.0의 빠르고 정확한 설계에는 히츠가 자체 개발한 두 가지 핵심 기술도 한몫 했다. 바로 ‘하이퍼 스크리닝 X(Hyper Screening X)’와 ‘하이퍼 바인딩 코폴딩(Hyper Binding Co-folding)’이다.
하이퍼 스크리닝 X는 11조개에 달하는 화합물 중에서 합성 가능성이 높고 약효가 기대되는 후보물질을 일차적으로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48시간 안에 유망한 후보물질을 뽑아낼 수 있다.
하이퍼 바인딩 코폴딩은 신약의 표적이 되는 단백질 이름만 입력하면, 그 단백질에 어떤 물질이 잘 결합할 수 있을지 자동으로 예측한다. 예컨대 암세포에 있는 단백질 이름만 대면, 어떤 약물이 여기에 달라붙어 효과를 낼지 AI가 미리 계산을 해주는 셈이다.
기존에는 저분자 합성약물에 집중했다면, 하이퍼랩 2.0은 항체-약물접합체(ADC), 표적단백질분해제(TPD) 등 복잡한 모달리티(modality·약물전달기술)까지 적용 범위를 넓혔다. 김 대표는 특히 최근 국내외 제약사들이 뛰어든 ADC 개발에 활용도가 높다고 보고 있다.
ADC는 항체에 약물을 붙여 정확히 암세포에만 전달하는 치료 기술이다. 그는 “ADC 후보물질을 개발하려면 항체, 페이로드(항암제) 그리고 이 둘을 이어줄 링커가 필요한데, 하이퍼랩을 활용하면 페이로드를 빠르게 설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히츠는 하이퍼랩 2.0을 통해 고객사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DDC 2025에서 만난 미국 암전문병원인 시티 오브 호프(City of Hope)와 글로벌 제약사 스위스 로슈의 자회사가 구독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 고객사인 MD앤더슨의 추천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기능성 식음료를 개발하는 유통 대기업도 고객사다. 현재 하이퍼랩의 고객사는 30곳에 달한다.
김 대표는 “특정 제약사만 쓰기보다, 약대생부터 연구기관, 제약사 누구나 쓸 수 있는 AI 인프라를 마련하는 게 히츠의 지향성”이라며 “앞으로도 하이퍼랩 고도화에 집중해 3.0, 4.0 업그레이드 버전을 계속 출시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