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이 관세 전쟁으로 발전한 가운데, 바이오 산업도 격전장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당초 의약품은 상호관세 부과 대상에서 빠졌지만, 별도 관세가 부과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더해 미 의회가 중국 바이오 기업을 겨냥한 생물보안법을 다시 추진해 관세에 이어 법까지 중국의 바이오 산업을 노린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 의회 산하 신흥 바이오기술 국가안보위원회(NSCEB)가 공개한 215쪽 분량의 보고서가 급성장한 중국의 바이오 기술에 대한 워싱턴의 깊은 우려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NSCEB는 첨단 바이오 기술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미국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기구다. 2021년 의원들과 업계, 학계 지도자, 전직 정부 관계자들로 설립됐다.
이번 보고서는 “중국이 바이오 분야에서 빠르게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미국이 향후 3년 안에 조처하지 않으면 영구적으로 뒤처질 수 있다”며 정부가 향후 5년간 최소 150억달러(약 23조원)를 바이오 연구에 투자할 것을 권고했다. 이와 함께 중국 기업들과의 거래를 제한하고 미국 대통령 직속 기구를 신설해 바이오 산업 전략을 전담하는 지휘 체계를 설립하라고 밝혔다.
NSCEB는 중국이 희토류와 같이 바이오 기술을 무기화하거나 수출을 제한할 경우 미국의 보건, 안보, 경제에 직접적 위협이 된다고 분석했다.
실제 중국은 원료 의약품과 제네릭(합성의약품 복제약)을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구개발(R&D) 경쟁력도 높아져 자체 신약 개발·허가 성과들이 잇따라 나왔다.
미국 의회가 중국 바이오 산업 발전에 대한 경계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미 의회는 중국 바이오 기업의 미국 진출을 저지하는 ‘생물보안법’을 추진했다. 이 법안은 미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다시 의회 산하 위원회가 중국 바이오 산업을 경계하는 보고서를 내면서 생물보안법 재추진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생물보안법이 상원을 통과하지 못해,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NSCEB 의장인 토드 영(Todd Young) 공화당 상원의원은 미 의회가 이번 권고안을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쳤다”고 전했다.
법과 함께 관세도 중국 바이오 산업을 향한 무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관세 부과에 보복 관세로 맞서는 ‘치킨게임’식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날 중국은 10일부터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34%에서 84%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104%로 높이자, 맞대응한 것이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1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한다면서, 중국을 제외한 나라에 부과한 보편·상호 관세를 90일간 유예한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이 발표한 상호관세 부과 대상에서 의약품은 빠졌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의약품에도 별도의 관세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자 미국·유럽·한국 증시 제약·바이오사들의 주가가 줄줄이 내렸다. 그러다 트관세 유예 발표에 주가가 일제히 반등하며 시장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 의회가 의약품 별도 관세 부과를 실행에 옮기고 생물보안법을 재추진하면 중국의 원료의약품과 제네릭 회사들이 직격탄을 맞고, 중국 바이오 기업들의 미국 시장 진출도 차단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 기업들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의 사업 길이 막히거나 중국 원료의약품 제조사들이 밀려 나가면 그 빈자리를 다른 국가 기업이 메울 수 있다는 셈법이 깔린 것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일라이 릴리, 존슨앤드존슨(J&J) 같은 미국 제약사들에도 자국 생산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만큼, 미·중 바이오 갈등이 한국에 유리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일본과 인도도 중국의 빈 자리를 노리고 있다”며 “특히 CDMO 시장에 진출한 후지필름은 이미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어 일본에 유리하게 흐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고 말했다. 그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으려면 정부의 바이오산업 육성 정책과 외교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