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는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쓰라리다. 그것은 그윽한 쾌감에 틀림없었다. 나는 혼곤히 잠이 든다.”
이상(李箱, 1910~1937년)은 일본 강점기인 1936년 잡지 ‘조광’에 발표한 단편소살 ‘날개’에서 이같이 썼다. 작가는 매춘부인 아내가 주는 돈으로 사는 주인공을 빈대에 빗댄 듯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상의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지 모른다. 경제가 발전하고 위생 상태가 좋아지면서 빈대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도 같은 이유로 의미를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빈대는 멸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 다시 번성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엄청난 살충제 공세를 받아 잠시 주춤했지만, 글로벌화와 세계 여행 시대에 편승해 활동 무대가 저개발국의 빈민촌에서 선진국의 화려한 호텔까지 확장됐다. 국내에서도 최근 한 가족 여행객이 지방 호텔의 이불과 벽, 천장에서 빈대들을 목격해 화제가 됐다. 바야흐로 빈대의 전성시대다.
◇고대 도시에 깃든 인류 최초의 기생충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워런 부스(Warren Booth) 교수는 먼 옛날 동굴에서 박쥐에 깃들어 살다가 6만년 전 우연히 네안데르탈인에 떨어진 이래 빈대는 늘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달 28일 국제 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박쥐에 사는 빈대는 갈수록 개체 수가 줄었지만, 인간에 정착한 빈대는 도시화와 함께 번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체코에서 채집한 빈대 19마리의 DNA를 비교했다. 이 중 9마리는 인간에 기생하는 빈대이고, 나머지는 박쥐에서 나온 것이었다. DNA는 시간이 가면서 일정한 속도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따라서 DNA를 분석하면 얼마나 많이 대(代)를 이어왔는지 알 수 있다. 1억년 전 공룡시대부터 나타난 두 그룹의 조상은 마지막 빙하기인 약 4만5000년 전에 수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는 숙주에 따라 달라졌다. 박쥐에 사는 빈대는 지금까지 계속 개체 수가 감소했지만, 인간으로 옮겨온 빈대는 8000년 전에 개체 수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농경 문명이 등장하면서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나타난 시기와 일치한다. 9000년 전 지금 튀르키예의 차탈회유크(Çatalhöyük)에는 수천명만 살았지만,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인 우루크(Uruk), 지금의 이라크에 있던 도시는 인구가 6만명이나 됐다.
이번 연구는 빈대가 인류 최초이자 가장 번성한 기생충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나중에 쥐에서 온 벼룩은 페스트균(菌)을 퍼뜨려 인류를 멸종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빈대는 역겨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소량의 피를 빠느라 피부를 찌르는 가벼운 자극 이상의 해를 주지는 않는다. 숙주와 같이 성장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유전적 대응 빨라 DDT에도 살아남아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이 빈대를 모르는 것은 1950년대 살충제인 DDT(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 방제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빈대 박멸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빈대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질겼다. 불과 5년 만에 DDT에 견디는 내성(耐性)이 생겼다.
과학자들은 독일 바퀴벌레와 가루이의 신경세포에서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부여한 유전자 돌연변이를 발견했다. 부스 교수는 지난달 의학 곤충학 저널에 빈대에서도 같은 돌연변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2024년 빈대의 유전자를 모두 해독해 생존력의 비밀을 풀 준비를 마쳤다.
공교롭게도 빈대가 살충제 내성을 갖게 된 것은 집에서 인간과 같이 사는 반려견, 반려묘 덕분이었다. 빈대에 효과가 있던 살충제는 1990년대 이후 사용이 금지됐다. 계속 싸워봐야 이기는 방법을 알 텐데, 적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개나 고양이의 벼룩을 없애는 데 쓴 살충제가 있었다.
반려동물용 살충제는 성분이 과거 빈대를 죽인 살충제와 비슷했다. 사람이 개, 고양이와 같이 자면서 이들에 쓴 살충제에 노출될 기회가 늘었다. 사람에 숨어있던 빈대 역시 그 과정에서 살충제에 내성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반려동물이 늘어난 도시 생활이 빈대에 새로운 활로를 제공한 셈이다.
◇농업에 쓴 박쥐 똥 비료 따라 퍼져
빈대와 인간의 만남을 DNA를 통해 역추적한 연구는 이전에도 있었다. 앞서 2019년 독일 드레스덴 공대 연구진은 전 세계에서 채집한 빈대의 DNA를 해독해 빈대가 인간으로 옮겨온 두 가지 경로를 확인했다. 50만년마다 새로운 빈대 종이 출현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동안 빈대가 6400만년 전 포유류로는 처음으로 박쥐에 기생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연구로 공룡시대인 1억1500만년 전까지 역사가 확장됐다. 연구진은 빈대가 인간으로 넘어온 경로 두 가지도 확인했다. 독수리에 기생하던 한 빈대가 인간을 숙주로 바꿨고, 다른 빈대는 박쥐에 기생하다가 전 세계적으로 비료로 쓰기 위해 박쥐 배설물 채취가 늘면서 역시 인간에 옮겨왔음을 확인했다.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고 외치려 했다. 평론가들은 주인공이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현했다고 해석했다. 현실은 늘 그렇듯 누구나 날개가 돋는 게 아니다. 그래도 실망은 말자. 빈대는 날개 하나 없어도 1억년 넘게 번성하지 않았나.
참고 자료
Biology Letters(2025), DOI: https://doi.org/10.1098/rsbl.2025.0061
Journal of Medical Entomology(2025), DOI: https://doi.org/10.1093/jme/tjaf033
Current Biology(2019), DOI: https://doi.org/10.1016/j.cub.2019.04.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