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6·3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여야 대선 후보들은 의대 증원을 할지 말지, 또 의대 증원에 반발해 1년 넘게 학교와 병원을 떠난 의대생, 전공의의 교육·수련 문제은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의대 증원을 반대하면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보는 유권자의 표심을 잃을 수 있고, 의대 증원을 찬성하면 의사들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의대생은 학교로 돌아왔지만, 전공의들은 여전히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의료계는 의대 증원 정책을 백지화하고 논의 주도권을 쥐는 데 주력하고 있다. 새 정부와 원점에서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의대 정원을 넘어 의료 교육 정상화, 필수 의료 패키지 정책, 수가(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문제에 대한 논의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각 당 후보들, 의대 증원 사실상 포기
여야 대선 후보들은 윤석열 정부가 의대 정원을 일방적으로 2000명 증원한 것에 회의적인 반응이다. 또 향후 의대 증원 향방에 대해서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선을 긋고 있는 식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6일 페이스북에서 “과학적 근거도, 의료 교육 현장이 준비도 없이 밀어붙인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문제의 시작”이라면서 “당사자 의견이 반영되고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필수 의료 정책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국민 참여형 의료 개혁 공론화 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사회적 합의를 거쳐 의료 개혁을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이 후보는 의대 정원은 보건복지부 산하 의료 인력 수급 추계 위원회(추계위)에서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추계위 논의를 거쳐 보건복지부 산하 보건 의료 정책 심의 위원회(보정심)에서 2027학년도 의대 정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추계위 위원을 추천받아 검증 절차를 거치는 단계”라고 했다. 추계위는 위원 구성을 마친 뒤 이르면 다음 달 출범한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 후보도 윤석열 정부가 의대 증원 정책을 추진할 때부터 비판해 왔다. 그는 지난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2000명 증원 기준이 과학적일 리가 있나”고 비판했고, 올해도 공식 석상에서 “의대 증원에 따른 낙수 의사론을 통해 의사 기대 소득을 낮추는 방식으로 지방에 의사를 내려보내겠다는 계산을 했지만 애초 작동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준석 후보는 지난 17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젊은의사 포럼에서도 “저는 의대 증원을 하면 안 된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며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에서 인구 감소가 일어나고 있는데, 왜 의료 영역에서만 이렇게 증원이 돼야 하는지 제 머리로서 이해가 안 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2000명을 백지화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김 후보는 “국민, 환자, 의료진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면서 “의료 정책은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해 새롭게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 환자, 전문가 목소리를 받아들이도록 미래 의료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했다. 의사들과 의료 개혁을 논의한다는 취지다.
의대생들은 의정 갈등 중에 작년부터 수업을 거부해 집단 유급됐다. 내년에 24, 25, 26학번 6000여 명이 한꺼번에 수업을 듣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의대생들은 “수업에 복귀해도 현장에서 혼란이 예상된다”면서 “의대 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부 대학은 3개 학번이 동시에 수업을 듣는 경우 26학번에게 먼저 수강 신청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로 했다.
◇의료사관학교, 형사책임 면제 안도 제시
전공의 집단 이탈로 인한 의료 공백이 커지면서 지역·필수의료 체계도 무너지고 있다. 응급의료, 산부인과, 소아과 등 필수 진료 분야에서 인력 부족이 심화하면서 공백이 더욱 커지는 추세다. 특히 수도권 대형병원에 의료 인력이 쏠리면서 지역 간 의료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의료계는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될 경우 지역 의료 시스템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재명 후보는 지역·필수·공공의료 문제의 해법으로 ‘인력 확보’를 먼저 꼽았다. 이를 위해 지역의사제, 지역의대 신설, 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 등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일정 기간 공공의료에 복무할 인력을 키우는 공공의대를 공약했다. 26일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17개 행정구역 공약에는 인천·전북·전남 지역에 공공의대를 신설하고, 경북 지역에 의대를 신설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의료계는 이 후보의 공공의대, 의대 신설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문수 후보는 의료안전망 복구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의료 개혁 정책 전반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대통령 직속 ‘미래의료위원회’를 신설해 취임 6개월 안에 의료공백을 해결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수도권 환자 쏠림을 의료 공백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의대 정원 확대 방안, 공공의대 설립 등에는 선을 긋고, 지역·필수의료 정책도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합의를 기반해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준석 후보는 필수·응급의료를 공약의 중심에 뒀다. 의료진의 필수의료과 기피 요인으로 꼽히는 의료사고 법적 책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정 기준에 따라 진료한 경우 형사책임을 면제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응급의료는 국가가 직접 책임지는 ‘국가완전책임제’로 전환하고, 전원수가·가산수가·당직수당 등 재정 지원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기존 권역외상센터는 6곳 내외로 통합해 ‘광역거점형 응급의료센터 체계’로 개편하고, 응급의료 이송을 위한 중앙조정센터와 닥터헬기 확충도 함께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병원 떠난 의사들, 대선 후 논의 입장
전국 수련병원들은 이달 말까지 전공의를 추가 모집하고 있지만 전공의들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이다. 전공의들은 차기 정부가 들어서면 의정 갈등이 어떤 방향으로 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복귀하기보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앞서 사직 전공의를 대표한 박단 의협 부회장도 “지금은 돌아갈 상황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지난 16일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의원회에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병원 관계자는 “뚜렷한 변화가 있지는 않다”고 했다. 다른 병원 관계자는 “일부 고연차가 돌아오길 기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전공의가 복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했다. 의료계 요구를 받아들여 필수 의료 패키지 정책을 철회해야 이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취지다.
복지부에 따르면 사직 전공의는 지난 3월 기준 1만1713명이다. 여기서 고연차 전공의(레지던트 3·4년차)는 3654명이다. 고연차 전공의는 매년 초 전문의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른다. 수련 규정에 따라 전공의들은 병원 이탈 기간이 3개월이 넘으면 전문의 시험을 응시할 수 없다. 올해 전공의 수련이 3월 시작했기 때문에 이달 말까지는 복귀해야 다음 달부터 수련을 받고 내년 초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다. 정부가 전공의를 추가 모집하며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도 이 때문이다.
전공의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정부 입장에서 2년 연속 전문의 배출이 급감하게 된다. 신규 전문의는 2024년 2727명에서 올해 509명으로 줄어들었다. 또 다른 병원 관계자는 “병원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전문의들이 줄어든다면 그만큼 환자 진료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수련 병원에 복귀하는 대신 일반의로 재취업한 전공의가 더 많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수련병원에서 사직했거나 임용을 포기한 레지던트(8791명) 가운데 61.4%(5399명)가 의료기관에 일반의로 재취업했다. 일반의는 전공의 수련 과정을 밟지 않는 의사로 전문의가 될 수 없다. 김 의원은 “사직 전공의가 이미 병의원에 취업했다”면서 “정부는 왜 전공의를 추가 모집해 이들을 위한 특혜를 베풀어야 하느냐”라고 했다.
강희경 전 서울의대·서울대병원 비상대책위원장(소아청소년과 교수)은 “수가 문제 해결,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리스크 완화, 수련 환경 개선 등이 눈에 보일 정도로 이뤄진다면, 전공의·의대생들도 더 이상 거짓뉴스에 호도되지 않고, 각자의 판단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며 “결코 어느 한쪽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료계는 물론 환자·국민이 모두 함께 숙의하는 과정을 거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